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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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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대 올림픽에 여성은 출전과 관전이 금지됐다. 우승자에게 주는 월계관은 받을 수 있었다. 전차경주의 경우 전차를 끄는 말 주인에게 월계관이 수여됐기 때문이다. 열혈여성들은 월계관을 손에 쥐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더 위험한 길을 찾았다. 남장을 하고 출전했다. 발각되면 절벽에서 던져지는 벌을 받았다. 여성 출전 금지는 1896년 첫 근대올림픽이 치러지고 나서야 없어졌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 여주인공들에게도 남장은 필요했다. 첫째, 생계를 위해. 『십이야(十二夜)』의 바이올라는 타고 있던 배가 난파돼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다. 하인 노릇이라도 해야 먹고살 텐데, 그러려면 남자가 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둘째, 신변의 안전을 위해. 『뜻대로 하세요』의 로절린드는 숙부의 노여움을 사 쫓겨나게 되자 남자로 위장해 길을 나선다. 두 작품은 남장한 여주인공을 진짜 남자로 착각한 다른 여자들 때문에 애정 플롯이 복잡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남장 설정이 나온다. 샤일록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안토니오를 구해주는 건 친구 아내 포샤다. 포샤는 판사로 변장, 그 유명한 “살 1파운드를 도려내되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린다.

 셰익스피어가 남장여자 설정을 애용한 이유는 뭘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엔 여성이 연극무대에 설 수 없었다. 변성기 전 어린 소년들이 여자로 분장했다. 아무리 미소년이라도 성(性)을 바꿔 연기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해 보였을 터. 그러니 ‘여자→남자’ 설정이 필요했을 거란 추측이다. 남장이 여성 캐릭터를 능동적·적극적으로 변모하게 하는 장치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여성이라는 한계를 남장으로 뛰어넘게 하는, 17세기식 페미니즘이랄까.

 2007년 ‘커피프린스 1호점’ 이후 한국 드라마에서도 남장여자 캐릭터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남자로 변장한 미소년(사실은 여자)과 그를 향한 감정에 괴로워하는 남자’도 꼭 등장한다. 일종의 동성애 코드다. 무엇보다 남장은 여성이 금녀(禁女)의 구역으로 들어가는 패스포트다. 최근 ‘성스폐인’이라는 조어를 낳은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남자 못지않은 학식을 지닌 윤희(박민영)가 성균관에 들어가는 방법은 남장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대의 벽을 넘으려고 했던 건 고대 그리스나 17세기 영국이나 조선시대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