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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러 가는 길, 생사를 끌어안은 상상력 만나러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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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브리엘 오로즈코는 “축구·농구 등 공놀이를 좋아하는데 공들의 튕겨 오르는 상하운동, 끊임없이 지속되는 움직임을 좋아한다”.

서울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 들어선 관람객은 잠시 혼란스럽다. 사막에 왔는가 싶더니 이내 축구 경기장에 간 것 같고, 원색 방울의 울렁거림에 흥겹다가 데굴데굴 빗방울 소리를 눈으로 즐긴다. 이 모든 상황과 작업은 여러 작가가 내놓은 다양한 볼거리인 듯싶지만 실은 개인전이다.

멕시코 작가 가브리엘 오로즈코(48)는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작품을 쉴 새 없이 만들어내느냐는 질문에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사막에 앉아 우주를 내다보는듯한 눈빛으로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이지요”라고 했다.

 “작업실이 여기저기 있어 지루할 새 없이 현실과 맞닥뜨리죠. 뉴욕은 유기적이고, 파리는 에로틱하며, 멕시코시티는 드라마틱해요. 지금 서울 전시장에 이 도시들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들이 모여 있죠. 우선 나를 비웁니다. 사물이 나를 유혹해 끌어당기면 그들을 받아들여 내 몸과 정신으로 매만져주죠.”

 오로즈코는 선(禪) 불교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의 작품들에서 동양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까닭이다. ‘숨쉬는 드로잉(Breathing Drawings)’은 눈을 감은 상태로 호흡 따라 강약이 나타난 선묘다. 서예의 일필휘지를 연상시킨다. 그는 원(Circles)을 좋아한다. 둥근 원과 구로 인생의 달관과 행복을 드러낸다.

가브리엘 오로즈코, 안테나, 200×200㎝, 2010. [PKM 트리니티 갤러리 제공]

 “사실(fact)을 존중합니다. 내 작품에 죽음의 진실, 현실의 진상이 드러나길 바라죠. 과장이나 감상주의를 혐오합니다. 육체적 경험, 짓이겨진 몸의 흔적들을 작업 속에 담아낼 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가 멕시코의 사막을 여행하며 주워 들고 온 사물들에선 죽음의 그늘이 진하게 풍겼다. 그것들은 때로 작품 속에 슬쩍 끼어들기도 하고, 작가의 손이 살짝 간 뒤 탁자 위에 늘어서기도 한다. 풍화된 자연이 들려주는 우주의 목소리는 파장이 크다.

 그는 “내 작품은 미술관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것”이라고 했다. 관람객은 오로즈코의 생사(生死)를 끌어안은 열광과 즉흥적 열기를 몸에 받아 들고 걸어나가는 셈이다. 전시는 다음 달 30일까지. 02-515-9496.

정재숙 선임기자

◆가브리엘 오로즈코 =1962년 멕시코 항구도시 베라크루즈에서 태어났다. 멕시코시티 국립미술대를 졸업한 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공부했다. 사진·설치·조각·드로잉·회화 등 자유롭고 유연하게 미술의 전 영역을 넘나드는 상상력, 일상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평범한 사물을 유머와 놀라움으로 재발견시키는 힘으로 주목 받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등 세계 각지 비엔날레의 단골 초대작가로 200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시작해 바젤 쿤스트뮤지엄을 거쳐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순회 개인전이 내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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