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나무 이름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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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는 일찍 나무 이름 하나 가졌지요

좀 주제넘는다 싶었지만

無憂樹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름 너무 크고 깊어 송구스러운 맘 없지 않았지만

방문 위에 나무 이름 하나 걸어놨지요

반듯한 송판 조각에 직접 글씨를 써

현판처럼 높게

방문 위 벽에 올려붙여놨지요

못난 필체여서 오히려 근사하게 보이는 필체로

無憂樹

그 아래서 먹고 자고 깨어났지요

일보러 나갈 때나 일보고 돌아와 방문 열기 전

잘못 삐친 획과 바르게 눕히지 못한 획이

천진성을 이르는 게 아니냐

이쪽으로 올려보고 저쪽으로 올려보며 음미하곤 했지요

때로 그 나무 이름

흐리고 어두운 웃음 짓게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두 팔 아래 눕거나 앉아 있는다 생각하면

마음의 잘못 편 팔다리 곧게 내려질 때 많고

마음의 잘못 치뜬 눈 반 내리감게 될 때 많았지요

그래서 수그려 한 곳을 오래 보고 있으려면

고요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잘못 일어난 고요가

뜻밖의 슬픔을 받아와 들통째 들이켜게 하지만

그때 무우수 크낙한 잎들이 반짝거리며 흔들리지요

누군들 근심걱정 없기를 꿈꾸지 않으리

그런 전언 하나 길게 뿌리며

길게 뿌려지는 전언 길게 들으며

나 일찍 나무 이름 하나는 참 잘 가졌다

처음엔 송구스러운 맘 없지 않았지만

들통의 것을 발 아래 부으며

슬픔은 자신뿐 아니라 남까지도 상하게 하지 깨우치지요

무우수 위로 몇 차례 비가 흩뿌리고 가면

햇빛 좋은 날을 골라 의자를 내와 그 위에 올라서서

무우수 크낙한 이파리들을 한장 한장 닦아내지요

탄생을 이야기해오고 깨달음을 이야기해오는

황금빛 덩어리

사르르 떨어지는 먼지와 함께 삼킨 적도 있지요

옛적 마야 부인이 그 아래서 태자를 낳은 나무

친정길 가는 중에 그 그늘에 자리 펴고 우리들의 태자를

아니 아니야. 근심걱정 없다는 상상의 나무

그렇지만 무우수는

그냥 나무 중의 하나

이름이 좋은 나무 중의 하나지요

이진명(1955~), '나무 이름 하나'

그렇지만 나는 걱정입니다. 무우수 나무 걱정. 송구스런 마음 걱정. 어린 왕자의 별에 두고 온 장미꽃 걱정, 고래 걱정, 새우 걱정, 북극성 걱정.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들과 한몸 되어 걱정하면 내 안의 더 큰 걱정이 사라질까요. 내 몸이 무우수 잎새처럼 반짝일까요.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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