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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한승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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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창작엔 보는 사람을 지겹게 하지 않을 정도의 과장이 불가피하다."

치열한 작품들이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가 때로 역겨울 때가 있다. 그 이유를 딱히 끄집어 내기 어려웠는데 일본인 여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해답을 줬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에서다. 그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단지 과장은 조금만 해야 한다. 너무 심하게 하면 현실에서 벗어난다. … 잭 니컬슨.로버트 드니로의 징그러울 정도의 뛰어난 표현력에서 마치 현실에 대한 어떤 편향된 인식을 강요받는 느낌이 든다."

어차피 창작자가 표현하는 현실은 '어떤 현실'이지 '전체 현실'이 아니다. 어떤 현실에 골몰한 나머지 그것을 전체 현실로 믿을 때 역겨운 과장이 나온다.

'친일 행위가 바로 반민족 행위인가'라고 반문한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도 과장이 지나친 경우다.

그는 친일우파와 친북좌경이 적대적으로 싸우며 존재하는 어떤 현실에만 골몰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친일우파를 택한 사람에게 도덕적 자부심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의 축복'이란 견해에 도달한 듯하다.

하지만 더 큰 현실에선 친일과 친북이 공존한다. 국권(나라의 주권)과 국체(자유 민주주의)가 엄연한 국민은 거리낄 게 없다. 자유롭고 당당하다. 일제 국권 상실기의 친일은 비굴과 무능이었지만 국권이 회복된 독립 나라에서 친일은 흉볼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기의 친북은 존재감과 정체성의 부정이었지만 자유와 시장의 국체가 확립된 나라에서 친북은 평화 관리와 연민이다.

친일이면서 친북일 수 있다. 동시적인 친미와 친중도 가능하다. 주견있는 성숙한 어른이 온갖 성질과 의도를 갖는 여러 사람을 살피며 교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제는 국권까지 부정하는 얼빠진 친일에 있다. 오늘의 친북 세력이 밉다고 과거 국권을 부정했던 친일까지 옹호하는 논리다. 대한민국의 국체를 부정하는 얼치기 친북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친일 세력이 아직 힘 좀 쓰고 있다고 오늘 잘 자라난 국체마저 부인하는 생각 아닌가.

과장은 과거와 현재, 줄기와 가지를 혼돈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공감력이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