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공공의 적을 현상수배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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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은 아랑곳 않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쩍벌남(男)', 양팔 벌려 신문을 쫙 펼치는 '펼칠남', 쓸데없이 여성 승객과 몸을 밀착하는 '추접남', 여자가 몸단속 잘하면 성추행 당할 일 없다고 주장하는 '몰상(몰상식한)남'.

여성들이 지목한 이른바 지하철의 '공공의 적'이다.

▶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지하철에서 성추행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오종택기자

세계여성의 날인 8일 오후 2시 서울 지하철 5호선 동대문운동장역 내 예술무대에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로 지하철 성추행 예방 캠페인이 벌어졌다. 이날 행사에서 주최측은 지하철에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 전시했다.

전시된 사진에는'방금 나도 이렇게 당했다', '누구는 다리 벌리고 앉을 줄 모르나' 등 여성들이 직접 쓴 종이쪽지들이 나붙었다. 그동안'공공의 적'들에게 고통받으면서도 어디 하소연할 곳 없었던 여성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사진을 본 정정이(39. 여)씨는 "괜히 말했다가 해코지 당할까 두려워서 웬만해서는 다리 좀 오므려 달라, 신문 접어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한다"고 사진 내용에 공감을 표시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정하경애 기획조직국장은 "지하철 성추행과 일부 승객들의 추태가 일상화된 지 오래다. 이를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피해를 줄여나가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며 행사의 취지를 밝혔다.

이날 행사에서는 '지하철 추태족' 겨냥한 경고용 호신용품도 선을 보였다. 쩍 벌린 다리를 오므려 주는 '오므리', 그래도 해결이 안 된다면 다리를 틀어주는'주리', 신문을 접어볼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신문을 잘라주는 '컷트', 남의 몸에 손을 대는 사람에게 매운 손맛을 보여주는 '에너자이저 울트라 꼬집기' 등 상담소 상근활동가들이 기발한 호신용품 모형을 들고 나와 사용법을 보여줬다.

소식을 듣고 일부러 행사장을 찾았다는 최예자(64. 여. 강북구 미아8동)씨는 "지하철 쩍벌남 때문에 한두 번 불편했던 게 아니다. 앞으로는 절대 참지 않겠다"며 쩍벌남 대응법을 수첩에 적었다.

지하철에서 고충을 겪는 여성승객을 위해 제작된 아이디어 카드 묶음도 1000원에 판매됐다. 현장에서 즉시 대처하기 힘들다면 상대에게 이 카드를 쥐어주고 지하철에서 내리면 된다. 카드에는 '내가 다 봤다-지하철 성추행 목격자', '신문은 반 접어서 보고 바바리코트는 꼭 잠그자-전국 펼칠남 예방 캠페인',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좌석에 젊은이가 앉아있다면 혹시 아프거나 다친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남성노인 폭언 피해 여고생 연합', '앉았을 때 손은 무릎 위에, 서있을 때 손은 주머니에-성추행범 오인 방지를 위한 문화시민연대' 등 행사기획단이 만든 가상 단체의 이름으로 표어가 적혀 있다.

하지만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이날 행사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한 중년 남성은"남자들이 다리 벌리는 건 어쩔 수 없다"며 "여자들이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주최측은 또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합정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한시간 가량'공공의 적'을 추방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승객들에게 성추행 예방법이 적힌 안내문을 나눠줬다.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행사단이 즉석에서 대형 '오므리'로 퍼포먼스를 보이자 신기한 듯 관심을 보였다. 성폭력상담소 김민혜정(26. 여. 관악구 신림동)씨는 "대체로 남성들은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았지만 여성들은 반가워하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지하철 내 성추행은 지난 2003년 지하철수사대가 적발한 범죄 중 41.8%를 차지해 가장 자주 일어나는 범죄로 꼽힌다. 또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실제 벌어진 성추행은 적발 건수의 최소 50배 이상으로 추정된다.

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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