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초현실주의 연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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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공산독재자 차우셰스쿠는 평양을 방문하고 받은 ‘감동’을 떨칠 수 없어 수도 부쿠레슈티를 평양처럼 개조했고, 세습을 시도했다. 그가 병약해지고 나서 루마니아는 사실상 부인 엘레나와 아들 니쿠에 의해 통치됐다. ‘국모(國母)’로 칭송됐던 엘레나는 소싯적 학습지진아였고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모’가 되고 나선 갑자기 ‘천재’가 돼 화학박사학위를 받고 ‘세계적인 과학자’로 변신했다. 루마니아의 과학자들이 쓰는 많은 논문에는 엘레나가 제1저자로 강제로 명시됐다.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성난 군중들이 테라스에 있는 그에게 야유를 퍼붓는 것을 환호를 보내는 것으로 착각하고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경호원에 의해 황급히 방 안으로 이끌려 들어간 그와 엘레나는 헬리콥터로 피신했지만, 곧 자기 측근들에게 체포돼 크리스마스 날 처참히 처형됐다. 총살형은 TV로 생중계됐다. 사형되기 직전 엘레나는 울부짖었다. “내가 이 나라의 국모이니라. 너희들이 어찌 감히 국모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김정일은 평양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경악했다.

 차우셰스쿠 치하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일은 초현실적 희극(surreal comedy)이었다. 하도 기괴해서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몽롱한 세계였다. 희극은 갑자기 비극(tragedy)으로 돌변했다. 때때로 희극과 비극은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전위적인 희극은 북한에서도 일어난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할아버지를 빼닮은 혹은 닮게 치장된, 그리고 고혈압·당뇨병을 갖고 있는 27세의 김정은은 갑자기 ‘대장’이 돼 “세 살 때 한시(漢詩)를 받아 적었다”는 등의 찬사를 받는다. 3대 세습 해프닝의 유일한 긍정적 효과는 이 희극을 놓고 벌어지는 좌파 사이의 논쟁과 바람직한 분화(分化)다.

 원래 사회주의는 근대산업화사회의 문제점 해결을 꿈꾸며 생겨난 이상주의적 사상이었다. 인간해방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추구한 이 사상은 근대화의 한 방식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초창기 소련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소비에트 모델”이라는 거대한 대안을 제시했고,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제공했다. 많은 이가 여러 이유로 이 사상에 매혹됐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사회주의에 투신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일례로 반공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던 제3공화국의 핵심 인사들 중 상당수가 과거 사회주의 운동 경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사회주의에 심취하고 추종했다는 것만으로는 죄가 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포용되고 이해돼야 할 사안이며, 미래의 통일한국에서도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단, 그동안 벌어졌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반인륜적 죄악에 대해 눈감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에 적용된 사회주의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이론적·실제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총체적인 파산을 맞았다. 오죽하면 사회주의권의 마지막 총아인 피델 카스트로조차 최근 “쿠바 사회주의 모델은 쿠바에서도 기능하지 않는다”고 실토했겠는가. 현재 지속가능한 사회주의 모델은 선거를 통한 노동자 정당의 합법적 집권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하나만 남았다. 한국 좌파의 운명도 결국 건강한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집권가능한 대안으로 성장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아직도 ‘수령님을 경애하는’ 주사파들은 물론이고 북한 체제에 호의적이고 굴종적인 종북주의자들이 주류를 형성하는 좌파의 앞날은 암담하다. 북한 세습을 영국이나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의 세습과 다를 바 없다 하고, 남한에도 “60여 년간 지속되는 친미정권의 세습이 있지 않느냐”고 처연하게 항변하는 눈물겨운 노력을 보라. 대한민국에서도 초현실주의 희극은 존재한다. 그럴수록 그들의 자살골 행진은 계속된다. 다행인 것은 이런 얼치기 좌파들을 비판하고 진정한 진보의 싹을 틔우려는 양심적 진보인사들과 ‘사회민주주의연대’의 외침이 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 주민들을 잘살게 하고 정치적 폭압이 대폭 완화된다면 김정은 아니라 죽은 김일성이 환생해서 통치하는 희극이 상연돼도 상관없다. 혹시라도 이 희극이 루마니아에서처럼 김씨 왕조의 비극으로 변한다 해도 알 바 아니다. 단지 이런 비극이 북한과 대한민국 주민들에게까지 화를 끼치면서 번지질 않길 간절히 기원할 뿐이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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