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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내부고발자가 칭찬받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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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내부고발은 두 얼굴이다. 하나는 투명·공정사회의 파수꾼, 다른 하나는 ‘상종 못할 놈’이다. 역사상 크고 은밀한 부정·비리·부패 대부분을 밝혀냈으니 파수꾼이요, 오죽 의리 없고 냉정하면 동료·상사·직장을 고변(告變)하겠느냐 해서 상종 못할 놈이다.

 내부고발은 형태도 다양하다. 세상을 단숨에 크게 바꾸기론 ‘권력암투형’만 한 게 없다. 카이사르에게 칼을 꽂았던 브루투스나 박정희를 쏜 김재규가 예다. ‘양심선언형’은 주로 선거판에서 많이 나온다. 1992년 이지문 육군 중위의 “군 부대에서 여당후보를 공개적으로 찍으라고 했다”는 발언은 당시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언론 제보형’은 소시민들이 주로 애용한다. 간혹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묻히는 경우가 더 많다.

 주 무대도 변했다. 예전엔 공직사회였지만 요즘은 기업에서 맹활약 중이다. 지난해엔 미국에서 전공(戰功)을 크게 올렸다. 세계 최대 제약회사 화이자가 상대였다. 화이자는 23억 달러(약 2조6000억원)의 벌금을 얻어맞았다. 부작용을 알면서도 숨기고 관절염 치료제를 팔다 내부고발에 걸렸다. 죄질도 나빴다. “의사가 부작용을 지적하면 ‘전직 직원들의 음해’라고 둘러대라”며 대응 매뉴얼까지 만들었다. 내부고발자 존 코프친스키는 보상금으로 5150만 달러(약 576억원)를 손에 쥐었다. 걸프전 참전용사 출신인 코프친스키는 “나는 군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명을 보호하라고 교육받았다”며 “그런 내가 사람에게 위험한 약을 팔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화이자는 몇 년 전에도 성장장애 치료약인 제노트로핀을 노화방지제로 판촉했다 역시 내부고발에 걸렸다. 그때 잘못을 고쳤더라면 나중의 큰 화는 피했을 것이다.

 국내 기업도 많이 걸렸다. 파괴력도 컸다. 가끔 정치자금과 엮이면 대기업 총수까지 줄줄이 법정에 서야 했다. 요즘 한창 떠들썩한 태광산업과 한화의 검찰 수사도 내부고발로 시작됐다. 태광산업 건은 자문위원을 맡던 이가 작심하고 세세한 비리 제보서를 만들어 검찰에 건네면서 불거졌다. 한화는 퇴직 직원의 차명계좌 제보가 출발점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기업이 워낙 커지고 복잡해진 데다 보안도 철저하다”며 “내부고발 없이는 기업 수사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내부고발을 미워하는 기업이 많다. 아예 발도 못 붙이게 차단장치를 마련하기도 한다. 당근은 기본이다. 핵심 업무를 맡았던 이들은 퇴직 후에도 잘 모신다. 급여도 현직 때의 70%를 주고 차·기사·비서를 몇 년간 제공하기도 한다. 채찍도 매섭다. 일단 ‘내부 고발자=성격 파탄자’로 몬다. 그 뒤 다시는 회사에 못 돌아오게 한다. 고발 내용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도 않는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내부비리가 터진 230개 기업을 2006년 분석했다. 내부고발을 한 임직원 중 82%가 해고 압력에 시달리거나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미국이 이럴진대 한국은 오죽하랴. 정부 공식 통계는 없지만 한국일보의 2007년 보도에 따르면 1990년 이후 내부고발자 20명 중 19명(95%)이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징계나 해고를 당한 사람도 16명(80%)이었다.

 내부고발을 ‘왕따’시키는 사회·기업엔 미래가 없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부패·비리를 막아낼 수 없어서다. 미국이 내부고발 덕에 환수한 금액의 15~30%를 고발자에게 보상금으로 주는 것도 그래서다. 2008년 현재 지급한 보상금만 20억 달러가 넘는다. 수백억원의 보상금을 탄 이들도 꽤 된다. 우리도 ▶해고 금지 ▶보상금 지급 등의 보호·장려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보상금은 환수액의 10% 정도면 어떨까.

 법과 제도 못지않게 급히 바꿔야 할 게 정서다. 내부고발자를 ‘고자질쟁이’ 취급하고, 그들을 정의·용기·양심 대신 결벽·무례·까칠로 부르는 한 투명·공정사회는 부지하세월이다. 하기야 그런 세상이 당장 와도 걱정이다. 혹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살기 불편해할까봐.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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