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58. 2차 세무사찰(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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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11월 25일 영화배우들이 필자의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서울지검을 방문했다. [중앙포토]

탈세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갇힌 지 아흐레째 되던 1996년 11월 25일. 부장검사가 자기 방으로 불렀다. '이미 기소됐는데 아직도 조사할 게 남았나?' 궁금해 하며 문을 들어서는데 "사장님!" 하고 울먹이는 소리가 터지더니 여럿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안성기.강수연.김갑수.김수철.김영철.오정해.정경순.황신혜 등 '내 식구' 같은 배우 여덟명이 와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내 눈시울도 금세 벌개졌다. 이들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이태원 사장을 석방해 달라'는 탄원서를 갖고 서울지검을 찾았던 것이다. 사흘 만에 430명이나 탄원서에 서명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와 영화 작업을 했던 주연 배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조연급 배우, 촬영.조명 등의 스태프, 심지어 연극배우.방송작가까지 동참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더욱 놀란 것은 전.현직 영화기자 36명이 서명한 진정서가 접수됐을 때였다. 이번에는 담당 검사도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하는 눈치였다. 기자가 출입처의 취재원을 감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취재원과 무슨 은밀한 거래나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용감하게(?) 탄원서를 냈을 뿐 아니라 어떤 기자는 조사를 받고 있는 검사실로 찾아와 격려해주기도 했다.

나는 한국영화가 이만큼이나 성장한 데는 언론의 공이 아주 크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고 다닌다. 기자는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다. 이들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한 흥행 변수다. 80년대 말 이후 우리 언론은 맹목적일 정도로 한국영화에 호의적이었고,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유능한 인력이 대거 충무로에 들어온 게 성장의 튼튼한 토대가 된 건 사실이지만 언론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한국영화의 팽창 속도는 훨씬 더뎠을 것이다.

아무튼 검사실에는 진정서가 쌓여갔다. 영화학회.영화평론가협회.전국영화과교수협의회 등에서도 진정서를 내주었고, 심지어 한 탈북자단체에서도 내주었다. 어렵게 남한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탈북 청년들에게 언젠가 작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낭트영화제에 영화 '축제'를 출품해 프랑스에 가 있었던 임권택 감독은 팩스로 탄원서를 보내왔다. '이태원 사장이 구속됐다는 말을 듣고 제 자신이 사막에 홀로 내버려진 것 같았습니다'라고 쓴 문구는 지금도 기억할 만큼 내 마음을 울렸다. 게다가 '축제'가 청룡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아 또 한번 나를 감동시켰다. 나를 대신해 시상대에 오른 둘째 아들이 "구속돼 계신 아버님이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라고 소감을 밝히는 부분에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도와준 덕분인지 한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보석 심사 재판에서 전봉진 부장판사가 "피고는 영화계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라고 할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들어갈 땐 파렴치범이었다가 나올 때는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인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영화계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깨끗이 접었다. 좋은 영화, 관객의 사랑을 받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나를 도와준 이들이 '그때 잘 도와줬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 다짐으로 또 10년을 흘러왔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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