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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불신의 기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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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프랑스의 수학자·과학자·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말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형태의 지식을 우선 체계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의 핵심은 의심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의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데카르트뿐만 아니라 근대 세계를 출범시킨 ‘무엇 무엇의 아버지들’은 인간성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면이 아니라 적어도 얼핏 보기엔 부정적인 면을 그들 이론체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변덕·위선·욕망·기만이 대부분의 인간들의 특징이라고 봤다.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1723~1790)가 말하는 국부(國富)의 원천도 인간의 이기심이다. 상기하자면,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 추구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의 경제 행동이 국부 증진과 생산력 향상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믿음·이타심뿐만 아니라 불신·이기심에서도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분출된 불신에 대해 낙심할 일만은 아니다.

 오늘 신문이나, 지난 주, 한 달 전, 일 년 전, 수십 년 전 신문을 펼쳐보면 불신이 단골 테마요 토픽이다. 정부의 정책, 정부의 발표, 공공기관, 여당·야당, 공교육, 사교육, 공영방송, 기부단체, 외식 산업, 먹을거리, 수돗물, 건강 식품, 중고차 등 불신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 불신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엄청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수돗물 불신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10년간 23조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나왔다. 공교육 불신에 따른 사회적 비용 또한 규모가 수십조원에 달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 사회의 불신은 그냥 불신이 아니라 ‘뿌리 깊은·만연한·팽배한’ 불신이다. 이런 불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뭔가를 믿는 존재이기 이전에, 혹은 동시에 뭔가를 의심하는 존재다. 믿음과 불신은 인간 본성에 내재돼 공존하는 사물에 대한 양대 인식 방법이다. 불신은 그래서 뿌리 뽑을 수도, 사회에서 격리·축소시킬 수도 없다. 데카르트·마키아벨리·스미스와 같은 근대의 아버지들로부터 지혜를 빌릴 수 있다. 불신을 양성화(陽性化)해 긍정적인 면을 도출할 수 있다. 불신을 받아들이자. 불신을 없앨 수는 없어도 순기능을 찾을 수는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불신은 이미 제 역할을 해 왔다. 우리나라는 ‘하면 된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불신과 회의로 성장한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G20(주요 20개국)이라는 위치에 온 것은 선진국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선진국 선생님들의 말을 의심하는 불량 학생이기도 했다. 자동차·반도체·철강 등의 산업 분야에 진출했을 때 우리는 선진국 전문가들의 ‘안 된다’는 회의적인 평가를 의심했다.

 믿음이 무조건 좋은 것도 불신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좋은 불신, 나쁜 불신, 좋은 믿음, 나쁜 믿음이 다 있다. 건강한 불신이 있는가 하면 건강하지 못한 믿음이 있다. 맹신(盲信)이나 ‘믿음 중독’은 나쁜 믿음이다. 모든 믿음에는 불신이라는 견제장치가 필요하다. 건강한 불신은 건강한 믿음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불신은 믿음이 수반하는 리스크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비생산적 불신, 소모적 불신, 통제되지 않는 불신은 나쁜 불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불신이 매도돼서는 안 된다. 도그마로 움직이는 독재체제에는 불신이란 있을 수 없다. 불신은 민주체제의 특징이자 특장이다.

 믿음과 불신은 역사를 움직여 온 양 날개다. 최근 사회과학에서도 믿음이나 신뢰뿐만 아니라 불신의 기능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인류는 어쩌면 믿음이 불신을 말살하고 탄압하는 시대 ▶믿음과 불신이 공존하는 시대 ▶믿음과 불신이 상생(相生)하고 서로 영감을 주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