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워크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1970~8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에게 ‘카세트리코더’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책가방만큼 큰 크기에 라디오와 카세트 재생기(플레이어)가 결합된 카세트리코더는 당시만 해도 신선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뒤 카세트리코더를 틀면 언제든지 듣고 또 들을 수 있게 했다. 별표·독수리표 전축이 사치품으로 분류되던 시절, 값비싼 LP 레코드판을 사 전축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감상하던 종전의 문화를 일시에 바꿔 놓은 것이다. LP세대를 이은 ‘카세트테이프 세대’는 이렇게 등장했다.

 63년 필립스가 개발한 카세트테이프는 80년대 전성시대(全盛時代)를 맞았다. 79년 일본의 소니가 출시한 휴대용 플레이어 ‘워크맨’이 그 추진체였다. 워크맨은 실내에서 주로 듣던 음악을 바깥세상으로 끌어냈다. 똑같은 카세트테이프를 쓰면서도 카세트리코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작은 디자인에 세계의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허리춤에 워크맨을 차고 스테레오 헤드폰을 낀 채 조깅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뉴욕·파리·도쿄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에 단골로 나오는 장면이 됐다.

 워크맨은 한때 한국에서 수입 금지 품목에 묶여 있었다. 코끼리표 전기밥통과 더불어 세관에서 수시로 적발되는 반입제한품목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보따리무역상·외국출장자를 통해 음성적으로 국내에 상륙한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국내에서 워크맨을 본뜬 ‘미니카세트’가 잇따라 나오자 워크맨 열풍이 불었다.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바꿔 놓으면서 세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부모는 헤드폰을 끼고 책상에 앉아 있는 자녀에게 “음악을 들으며 무슨 공부가 되느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이들에게 워크맨은 이미 공기와 같았다. 카세트테이프와 워크맨의 시대는 CD 시대가 도래하면서 쇠락(衰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2000년대 MP3플레이어의 보급으로 사실상 종언(終焉)을 고했다.

 소니가 카세트테이프용 워크맨 생산을 중단했다고 발표했다. 워크맨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2억 대 이상 팔린 히트 상품으로 영어사전에 보통명사로 올라 있다. 워크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카세트테이프는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른바 ‘뽕짝 메들리’를 담고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피고 지는 꽃처럼 기술의 변천을 어찌하겠는가. 워크맨의 퇴장은 카세트테이프 세대에게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되새기게 한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