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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즐겨읽기] 살아 숨쉬는 미국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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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살아 숨쉬는 미국역사
박보균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301쪽, 1만3000원

지난 2003년 말 저자는 미국 버지니아주 남쪽의 애포머톡스 재판소를 찾는다. 1865년 남군이 북군에 대한 항복 조인식을 가졌던 명소라서 주변에 전적비.기념비가 즐비하겠지 했는데, 웬걸 눈씻고 봐도 그런 것은 없었다. 당시 미국인구의 4%인 112만명 사상자를 낸 남북전쟁의 명소 입구의 안내판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에서 리(남군 사령관)와 그랜트(북군 사령관), 그리고 그들의 군대는 미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를 연출했다." 그게 전부였다.

저자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고 털어놓는다. 승자의 오만함이나 패자의 절망 대신 "나라가 다시 합쳐진 곳"(안내 팸플릿 글귀)을 강조하는 전후 처리의 지혜 때문이다.

이 책이 겨냥하는 것은 새로운 미국 읽기. 기왕에 독자들이 접했던 미국통사.단순개설서와 달리 그들 사회와 국민의식의 형성과정을 규정했던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는 작업이다. 현직 기자(중앙일보 부국장)인 저자는 "현장이 빈약한 연구서는 학문적 신뢰와 역사적 실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239쪽)고 단언하는데, 그것은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때문에 미국 정체성 이해의 열쇠를 쥔 남북전쟁을 알기 위해 애포머톡스 등을 찾았고, 흑백갈등의 뿌리를 추적하기 위해 플라스키를 답사한다. 또 개인의 총기휴대 권리를 명문화한 수정헌법 2조의 비밀을 풀기 위해 버지니아주의 전국총기박물관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마이클 무어가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조롱했던 보수주의자 배우 찰턴 헤스턴도 등장한다.

▶ 애포머톡스 재판소에서 남군사령관 리 장군(왼쪽)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을 북군사령관 그랜트 장군이 지켜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자임하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키워드도 설명된다. 건국 초기의 개척정신과 팽창주의는 21세기 국제무대에서 독선적인 일방주의로 뻗어나갈 수도 있는 미국적 심리의 저변이라는 것이다. 이런 균형감각 덕에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맹목적 친미와 무턱댄 반미 사이의 골을 메워줄 것이 기대된다.

이 책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제3부 '미국 속에 살아 숨쉬는 대한제국'. 한국근대사가 미국사와 얽혀 있는 지점에 대한 탐색은 조선의 망국을 결정한 포츠머스 조약(1905년)의 현장 탐방으로 이어지며, 워싱턴에 자리잡은 대한제국의 유일한 해외 공사관 건물인 '대조선 주미국 화성돈 공사관'에 대한 정부의 관심 촉구로 연결된다. 저자는 2003년(조지타운대)과 1995년(존스 홉킨스대) 두 차례 미국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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