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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깊이 읽기] 중국의 정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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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관념사란 무엇인가
진관타오·류칭펑 지음
양일모 외 옮김, 푸른역사
전2권, 612쪽·572쪽
3만9500원·3만8500원

중국이라는 기관차는 일본과 독일을 추월하고 이제 미국과 결승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시장질서가 가져온 새로운 중국의 현실이다. 중국의 비판적 문화연구자 왕샤오밍 같은 학자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즉 시장질서가 오늘의 중국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을 이끌던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대체했다는 것이다. 시장질서의 무한 확대를 염려하는 이들은 ‘포스트마오쩌둥시대’를 제시하기도 한다. 중국의 사상계는 이데올로기 해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독법을 들고 20년 만에 대륙에 귀환한 지식인이 있다. 현재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제3의 인생을 살고 있는 ‘80년대 중국계몽주의의 대부’ 진관타오(金觀濤)·류칭펑(劉靑峰) 부부다. 이들은 이데올로기 해체시대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그 해체된 이데올로기, 즉 중국의 혁명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작업을 이른바 ‘관념사 연구’로 수행했다.

천안문 사태 배경의 다큐 영화 ‘태평천국의 문’(1998년 개봉) 한 장면. 천안문 사태는 중국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또 하나의 문이다. [중앙포토]

 관념이란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상부구조가 아니다. 책의 주장에 따르면 키워드와 문장을 통해 드러나는 사상이다. 이 관념의 다발이 모여서 형성한 것이 이데올로기다. 이 관념을 형성하는 것을 키워드로 본다. 저자는 현대중국 이데올로기 형성의 주역이라 생각되는 주요 관념과 92개의 키워드를 추출해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주요 관념이란 진리·권리·개인·사회·민주·세계·경제·과학·혁명 등이다. 이 관념들을 구성하는 키워드들의 시기별 사용빈도를 통계처리했다. 저자가 10년에 걸쳐 구축한 중국 근현대사상사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했다고 한다.

 일례로 권리와 개인이란 관념의 사용추이를 보면, 근대 서양에서 권리의 주체는 주로 개인인데 1900년 이전 중국에서 권리의 주체는 국가였다. 권리의 주체로 개인이 본격 등장한 시기는 1900년 이후다. 이 시기에 전통 중국엔 없던 관념인 개인도 대두된다. 이것이 책에서 말하는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이어 개인의 권리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집단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사회주의가 이를 주도했다고 본다. 저자들은 이같은 통계의 결과를 전통적 관념과 서양 근대적 관념이 언어에 남긴 흔적으로 파악한다. 이 흔적을 쫓다보면 중국 혁명이란 오로지 서양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이식이 아니라 중국 전통 유교의 중국적 재현이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근현대사의 새로운 시대 구분을 제안했다. 우선 두 저자는 중국 근현대사를 서양 근대 관념의 수용사로 파악한다. 중국 근현대사를 3단계로 나눴다. 서양 근대 관념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단계’-‘학습하는 단계’-‘소화·종합·재구성하여 중국 특유의 현대 관념을 형성하는 단계’이다. 이 시기를 각각 ‘전근대’(1830∼1895), ‘근대’(1895∼1915), ‘현대’(1915∼현재)로 명명했다(중국식 표현으로는 근대-현대-당대로 우리와 다름. 책은 중국식 표기를 따름). 1919년을 근대의 기점, 1949년을 현대의 기점으로 보는 기존 통념과는 다른 주장이다. 중국사 학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 셈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서구적 근대를 중국이 제대로 배워야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런데 서구중심주의 해체를 화두로 삼는 탈근대가 논의되는 이 시대에, 서구 근대적 기획의 완성을 중국사의 과제로 설정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이책을 번역한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은 얼마 전 독일 개념사의 기념비적 저작도 번역한 바 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주도한 『개념사 사전』(전5권, 2010)이다. 개념사와 관념사는 역사학의 전문 용어다. 개념사는 관념사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갖는다. 코젤렉의 개념사는 근대의 병리적 현상을 해명하려 한다. 반면 『관념사란 무엇인가』는 서구 근대의 기획을 중국에 실현시키려 한다. 개념사가 반계몽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는 데 반해, 관념사는 근대적 계몽을 기획하는 것이다.

 진관타오와 류칭펑이 주도하는 ‘중국의 관념사’는 서구 근대 관념에 비추어 자기를 인식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변형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후발 주자들이 선진국을 따라가는 과정에 격어야할 숙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개념사와 관념사 사이에 양다리 걸치기는 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요컨대 계몽을 위한 관념사와 ‘탈(post)계몽’을 위한 개념사라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의 역사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은 물론 한국 역사학의 과제로 새롭게 대두된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 신계몽주의 대부’ 진관타오

신간 『관념사란 무엇인가』의 대표저자 진관타오(63·사진)가 유명해진 것은 1989년 6월 천안문(天安門) 사태 직후다. 사태를 촉발한 배경으로 1년 전인 1988년 6월 중국중앙방송이 내보낸 다큐멘터리 ‘하상(河<6BA4>)’이 지목됐다. 제목부터 중국을 상징하는 황하가 죽었다는 뜻. 중국문명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해양문화, 즉 서양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배우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는 당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천안문 사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상’의 이론적 바탕을 진관타오의 저서 『흥성과 위기』(1984)에서 찾고 있다. 진관타오는 ‘하상’ 제작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맨 앞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진관타오가 1980년대 중국 민주화운동의 이론적 대부로 꼽히는 이유다. 천안문 사태 이후 수배를 당하고 결국 홍콩으로 쫓겨났다. 중국 민주화운동이란 측면에서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류샤오보와도 맥락을 함께 한다. 2008년 ‘중국인권선언’(08 헌장)에도 함께 참여했다.

 『관념사란 무엇인가』는 20여년에 걸친 그의 계몽적 저술 활동을 집대성한 작업이다. 오늘의 중국이 있게 한 근원적 요소로 그가 주목하는 것은 계급혁명이 아닌, 2000년간 지속된 전통적 유교 관념이다. 유교의 관념 구조인 도덕적 이상주의의 폐해를 지적한다. 도덕적 이상을 현실에 실현해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파괴적 오류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권리·개인과 같은 키워드의 기원이 서양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같은 서양 근대의 관념이 중국에 들어와 변형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궁극적으로 전통의 폐습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 근대의 긍정적 요소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중국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점에서 그는 ‘신계몽주의의 대부’라 할 만하다.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간의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이번 책에 더해 무게를 더했다. 1830년부터 1930년까지 중국에서 간행된 신문·잡지·문서·교과서·번역서를 분석했다. 2008년 홍콩에서 출간돼 화제가 됐다. 올해 중국 대륙에서도 출간됐다. 홍콩과 대만에서 주로 활동해 온 그는 올해부터 중국 대륙에 초청강연도 나간다고 한다.

배영대 기자



[편집자 쪽지] 중국 근현대사를 보는 색다른 눈

‘깊이 읽기’에 소개한 『관념사란 무엇인가』는 책 제목이 개론서 같지만 실제 내용은 그를 훨씬 뛰어넘어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합니다. 문화적 해석입니다. ‘태평천국의 난→신해혁명→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정치 사건 위주의 해석과 크게 다르네요. 쉽게 바뀌지 않는 전통 관념들이 서양 근대 문명과 어떻게 뒤섞이는지 살펴보는데, 우리와도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저자는 19~20세기 초 중국에서 출간된 문헌을 대부분 뒤진 것 같습니다.

전통과 근대가 맞물리는 시기, 우리 지식인도 많은 저술을 했습니다. 22면 ‘옛책 다시보기’코너에 소개한 민세 안재홍 선생도 그중 한 분입니다. 민세만해도 수많은 문장을 남겼지만 한문투의 글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 문헌에 대한 번역부터 해야하는 실정입니다.

배영대 학술·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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