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들 한국인 취향 맞춘 마케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5면

▶ 신선함보다 풍성함이 좋아… 과일코너 입구쪽에

전 세계의 까르푸 매장은 모두 과일이나 야채를 파는 신선식품 코너를 출구 쪽에 두고 있다. 입구 가까운 곳에 배치해 소비자가 들어올 때 과일과 야채를 사게 되면, 과일이 짓눌리고 쇼핑하는 동안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만은 예외다. 신선식품 코너가 입구 쪽에 있다. 까르푸 측에 따르면 2000년께 까르푸를 찾은 쇼핑객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과일.야채 매장을 입구에 배치하는 것을 선호하더라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매장에 들어서면서 풍성한 과일을 보면 기분이 좋더라는 것이 소비자들의 반응이었다. 그 후 까르푸는 매장 배치를 바꾸거나 새로 점포를 낼 때는 신선식품을 입구 근처에 배치하고 있다.

외국 기업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한국 소비자만의 특성이 있다. 대부분 한국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면 설명할 수 있지만 까르푸의 경우처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고객이 원하는 것이기에 외국 기업들은 그에 맞춰 '한국 현지화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까르푸는 할인점인데도 의류 코너의 바닥을 원목으로 깔았다. 까르푸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싸구려를 사 입는다'는 느낌을 싫어해 의류 매장만은 백화점 분위기가 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음… 활어회 직접 떠 줘

한국 내 월마트 일부 점포에는 세계에서 드물게 '가족 화장실'이 있다. 어른 변기와 유아용 변기가 한 공간에 들어 있다. 부모가 어린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는 일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많다고 한다. 월마트 이세영 팀장은 "한국에서는 대형 할인점 쇼핑을 일종의 가족 나들이로 여긴다"면서 "한국에 있는 할인점에 푸드코트가 발달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말했다. 즉석에서 생선회를 떠주는 코너도 한국에만 있다. 일본도 회 코너가 있지만 이미 뜬 회를 먹을 수 있을 뿐 즉석 코너는 없다. 할인점들은 한국 소비자의 독특한 요구에 맞춰 변하고 있지만, 적절히 대처할 수 없어 속을 끓이는 기업도 있다. 세계 최대의 가전업체인 유럽계 회사 일렉트로룩스다. 고전하는 제품은 드럼 세탁기. 이 분야 세계 1위 업체인데도 한국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문제는 용량이다. 일렉트로룩스 제품 중 제일 큰 게 7.5㎏짜리다. 하지만 한국 소비자가 찾는 드럼 세탁기 주종은 10㎏짜리. LG전자 '트롬'의 경우 제일 작은 모델이 8㎏으로 일렉트로룩스의 최대 모델보다 용량이 크다.

일렉트로룩스 측은 "7.5㎏짜리로도 충분히 이불 빨래를 할 수 있고, 한국 소비자들이 이를 아는 데도 잘 선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LG전자 윤인덕 과장은 "국내에서 봉 세탁기 등을 놓고 업체 간 용량 경쟁이 벌어져 이미 1990년대 중반에 10㎏짜리 세탁기가 나왔다"면서 "드럼세탁기라면 최소한 10㎏은 넘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국내 소비자들이 갖게 됐다"고 말했다. LG전자도 유럽에 수출하는 모델은 6~7㎏짜리다. 일렉트로룩스가 대형 제품을 국내 시장에 내놓으면 경쟁력은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그러나 일렉트로룩스는 한국 고객만을 위해 생산라인을 따로 만드는 것은 과잉투자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소비자용 특별 제품을 만드는 기업도 있다. '오랄-B'칫솔을 만드는 질레트다. 이 회사는 최근 칫솔모가 가느다란 '미세모' 칫솔을 본격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LG생활건강 등이 미세모 칫솔을 내놓고 이것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질레트코리아가 미국 본사에 생산을 요청했다. 질레트코리아 관계자는 "다른 나라들은 전동 칫솔을 많이 쓰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면서 "일반 칫솔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커 본사가 한국 시장을 겨냥해 미세모 칫솔을 생산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글=권혁주.최준호 기자<woongjoo@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shini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