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건강] 혀를 알면 '맛있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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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의 달인이라고 하는 소믈리에.

와인에 대한 지식만큼이나 포도주의 미묘한 맛을 가려내는 감별력은 일반인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다.

미각은 오감 중 인간의 삶을 가장 즐겁게 하는 조물주의 선물. 산해진미의 진가도 맛을 아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미각도 개발하기 나름이다.

단조로운 메뉴와 기성 식품을 고집하는 사람과 맛집을 찾아다니며 입을 즐기는 사람들의 미각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현대인은 미각을 잃어간다=요즘 젊은 세대의 미각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일본의 한 연구결과는 심각한 미각의 퇴화(?)를 경고한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설탕(단맛).소금(짠맛).식초(신맛).키니네(쓴맛).글루탐산(감칠맛)을 증류수에 농도 0.001~0.04%까지 4단계로 엷게 탄 뒤 맛을 가리게 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가장 낮은 농도에서 다섯 가지 맛을 구별한 학생이 27%였다. 이는 20년 전 같은 실험내용 결과인 50%에 크게 못미치는 수준. 특히 가장 짙은 농도에서 다섯 가지 맛을 모두 맞힌 학생은 절반에 불과했다.

국내에선 유사한 실험이 없지만 일본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식단은 다르지만 음식을 먹는 패턴이 유사하다는 것. 예컨대 과거에는 대가족이 모여 다양한 반찬을 한 상 차려놓고 젓가락으로 이것 저것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핵가족화가 되면서 반찬 가짓수가 줄었을 뿐 아니라 외식을 할 때도 단품 위주이기 때문에 미각 자극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성화된 이유식이나 햄버거처럼 제품화된 미각에 길드는 것도 한 이유다. 표준화된 맛에 길든다는 것은 새로운 맛을 볼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밝혀지지 않은 미각의 신비=미묘한 맛을 느끼고, 그 차이를 가려내는 인간의 능력은 의학적으로 아직 설명하지 못한다. 마치 IQ의 차이를 밝혀내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이 밝힌 미각은 단지 짜고, 달고, 시고, 쓴맛 정도다. 단맛과 신맛은 미각 신경세포의 수용체가, 쓴맛과 짠맛은 미각 신경세포막의 이온채널을 통해 느낌이 전달된다. 떫은 맛은 혀와 구강 점막의 느낌이, 매운 맛은 통각이므로 미각 세포와는 관련이 없다.

맛을 느끼는 것은 미뢰라고 하는 맛 담당 신경세포와 후각, 그리고 뇌의 종합작품이다. 혀에서 느끼는 맛과 냄새가 어우러져 뇌중추를 자극하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맛을 판단하는 것. 따라서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손상되면 미각을 상실한다.

우선 구강 상태. 맛을 느끼려면 침이 있어야 하고(당뇨환자는 구강건조 때문에 맛을 잘 모른다), 백태가 끼지 않는 등 혀가 깨끗해야 한다. 물론 미뢰도 살아 있어야 한다(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미뢰가 손상됨). 콧속 비강 점막도 건강해야 한다. 코를 막거나 감기가 들면 맛을 못 느끼는 것은 이곳이 분비물로 덮여 있기 때문. 약을 먹었을 때는 약 성분이 침에 녹아 나와 맛이 달라진다.

또 미네랄 중 아연이 부족해도 맛을 못 느낀다. 1개월마다 교체되는 미각세포를 만드는 데 아연이 필수 영양소이기 때문이다.

◆미각을 훈련하려면=천부적으로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미맹(味盲)이라 할지라도 쓴맛을 내는 특수화학물질 PTC와 PROP를 느끼는 감각이 없을 뿐이다. 따라서 식생활에서 맛을 즐기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미뢰는 이미 태아 시절부터 형성되고, 태어나 음식을 접하면서 선택적으로 키워진다. 우유 맛에 길든 아이가 엄마 젖을 피하는 이유다. 이후 미각은 후각 및 뇌의 발달과 함께 성장하면서 발달한다.

전문가들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음식 체험을 하도록 권한다. 젓가락으로 골고루 먹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 어른들은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미각여행을 해보자. 외식을 할 때는 단품이나 세트 메뉴를 지양하고, 한 상 차려놓는 한정식 또는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음식을 시켜 골고루 먹자.

잘 씹는 것도 중요하다. 음식이 침과 골고루 섞여 입안에 머물 때 맛 세포가 미각정보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아연 부족이 예상된다면 미네랄 영양제나 굴을 듬뿍 먹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굴은 큰 것으로 하루 한두 개만 먹어도 충분하다. 후각을 단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향기로운 여러 종류의 차, 또는 커피도 한 가지를 고집하기보다 다양하게 선택해 냄새를 음미하며 마시자.

이를 닦을 때는 혀도 칫솔로 살살 문질러 백태를 벗기는 등 구강을 청결히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미각의 퇴화는 나이와 상관 없다. 개인차가 있지만 단지 침 분비 등 구강의 변화 또는 약 복용, 단조로운 식사가 원인이다.

고종관 건강팀장

도움말 : 경북대 치대 구강내과 최재갑 교수

연세대 치대 구강내과 안형준 교수

■ 맛의 감각을 살리려면

- 인공향신료를 쓰지 않고 재료 천연의 맛을 즐긴다

- 여러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면서 맛을 비교하고 음미한다

- 같은 재료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어본다

(닭튀김.닭찜.닭죽 등)

- 외식을 할 때는 뷔페를 택해 골고루 먹는다

- 음식이나 차를 마실 때는 냄새를 느끼면서 맛을 본다

- 칫솔질을 할 때 백태를 벗기는 등 입속을 항상 청결히 한다

- 아연을 적당히 섭취한다(간.굴.새우.곡류 껍질 등)

- 맛을 오랫동안 느끼지 못할 때는 질병이 의심되므로 의사와 상담한다

■ 어린이에게 맛을 훈련시키려면

- 단맛(설탕.사탕.꿀 등)

- 신맛(레몬.과일 식초 등)

- 쓴맛(블랙커피.한약.씀바귀 등)

■ 주의 사항

- 단맛은 식욕을 떨어뜨리므로 적당히

- 식초는 부드러운 것으로

- 커피는 자주 먹지 않는다

- 하루 2~3회 조금씩 혀의 각 부위에서 느끼는 감각을 말하게 한다

(혀의 앞쪽에 단맛, 뒤쪽에 쓴맛, 좌우에 신맛, 혀 전체에 짠맛을 느끼는 미각세포가 밀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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