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55. 첫 해외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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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마닐라에서 열린 서태평양 건설업자대회에 참가한 최종환 삼환기업 회장,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 필자. (왼쪽부터)

나의 첫 해외 나들이는 1968년 3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서태평양 건설업자대회 참가였다. 한국.일본.인도네시아 등 13개국의 주요 건설업자가 모이는 자리였다. 한국에서는 건설협회장이자 삼부토건 대표인 조정구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삼환기업 최종환 회장 등이 참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건설공제조합장이 옵서버로 동행했다.

매출 규모로 보면 사실 나는 그 자리에 낄 형편이 아니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61년 5.16 이후 '명동시절'을 청산한 나는 아는 선배를 통해 건설군납업자 친목회에 들어가 입찰 담합을 주도하는 일을 했다. 이를 계기로 건설업에 눈을 떠 64년 태흥상공을 인수한 뒤 주한미군에서 발주하는 사업을 따내 회사를 꾸려나갔다. 하지만 아직 소기업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큰 대회에 나가게 된 건 친목회 일을 하면서 꽤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주최 측은 참가 업체의 정보를 담은 수첩을 나눠줬다. 나는 그 수첩에 실린 일본 쪽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대표이사가 일본건설협회장을 맡고 있는 '마에다구미'라는 회사는 전년도 수주액이 700억원이나 되는 일본 건설업체 랭킹 7위였다. 당시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총 화폐 규모가 400억원이라고 알고 있던 나는 그 엄청난 차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웬만한 일본 건설사 한 곳보다도 돈벌이를 못하는 나라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호텔 로비를 서성대는데 젊은 일본인이 눈에 띄었다. 이름표를 보니 마침 마에다구미 직원이었다. 나는 영어엔 '벙어리'였지만 일제 때 초등학교 3학년까지 공부한 터라 간단한 일본어는 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한국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몇 년 전 경주에 갔었다. 왜 그 석굴암이라고 있지. 거기 가다가 죽는 줄 알았다. 너희 나라에서 만든 차 있지 않나. 그 차가 비탈길을 오르다 차축이 부러져 도중에 내려서 한참 걸어가야 했거든." 뭐 그리 한심한 나라가 있느냐는 투였다. 당시 시발택시라고, 일본에서 들여온 부품으로 조립한 최초의 국산차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기가 죽어있는데 일개 직원에게서까지 그런 소리를 들으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왜 그러냐"며 갸우뚱거리는 그를 호텔 수영장 근처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사람 눈길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짜고짜 정강이를 걷어차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뭣이 어째, 한국 차가 어떻다고. 한국에 대한 기억이 그런 것 밖에 없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웅크린 채 입가의 피를 훔치는 그를 남겨두고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내 이름표를 분명히 봤을 테고, 주최 측에 항의라도 하면 톡톡히 나라 망신을 시킬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회장단이 묵고 있던 방을 두드렸다. "어서 와, 미스터 리." 겨우 서른두 살인 데다 얼굴까지 앳돼 보여 그들은 나를 '이 사장' 대신 그렇게 불렀다.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한병기 조합장이 "뭐 어때, 잘 때렸어. 젊은 사람끼리 그럴 수 있는 거지. 걱정하지 마"라며 어깨를 두드렸고, 다른 이들도 "괜찮다"며 두둔해 주었다. 그렇게 방을 나섰지만 도저히 꺼림칙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일정이 며칠 더 남았건만 나는 곧장 귀국하기로 마음먹고 호텔 지하에 있는 여행사를 찾아갔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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