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최부의 구사일생 고국 귀환,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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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488년 명나라 영파 해안에 표류해 귀환한 뒤 『표해록』을 남겨 유명한 최부와 그의 조상 최사전, 최부의 외손인 유희춘을 모시고 있는 무양서원(武陽書院). 세 사람 외에 병자호란 직전 절의를 지킨 나덕헌도 모시고 있다. 무양서원은 1927년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서원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1487년(성종 18년) 11월 교리 최부(崔溥·1454~1504)는 삼읍추쇄경차관(三邑推刷敬差官)이란 직함을 갖고 제주도에 도착한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도망쳐 들어간 죄인들을 색출하고 노비와 목장 행정을 살피라고 파견된 특별 어사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 30일 최부는 나주에서 달려온 집안 노비로부터 부친의 부음을 듣는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황망히 귀향을 서두르는 그를 제주의 지인들은 만류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큰 바람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며 배를 타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윤1월 3일, 최부는 나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추자도 부근까지 왔을 때 배는 역풍에 휘말려 거꾸로 떠내려가고 만다.

 대양에서 표류하기를 열흘 남짓, 최부와 일행 마흔세 명은 말린 쌀을 씹고, 오줌과 빗물을 받아 마시며 악전고투를 벌인다. 12일 명나라 영파(寧波) 근처의 하산(下山)이라는 곳에 표착한다. 그곳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해적 두목은 최부에게 금은을 내놓으라며 작두로 목을 베려고 덤빈다. 최부의 부하들이 빌면서 애원하자 그들은 의복과 식량 등을 빼앗은 뒤 배의 노와 닻을 끊어 버리고 사라진다.

 17일 우두(牛頭)라는 해안에 이르렀을 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그곳을 지키던 사자채(獅子寨)의 명 관원들은 최부 일행을 왜구(倭寇)로 확신하고 목을 베어 공을 세우려고 덤빈다. 최부의 부하들은 최부에게 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간청한다. 사모관대를 갖추면 조선의 관원임을 인정받아 왜구 혐의를 벗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의 도리에 어긋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효도와 신의가 아닌 일은 차마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부하들이 “목숨을 건진 뒤에야 의리도 지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최부 일행은 결국 그들을 죽이려는 명군을 피해 내륙의 마을로 도주한다.

 굶주림과 공포에 지친 최부 일행은 윤1월 21일 무렵에야 비로소 조선 사람임을 인정받고 왜구라는 오해가 풀렸다. 이후 영파부의 관원은 최부 일행을 북경으로 보낸다. 영파에서 항주(杭州)·가흥(嘉興)·소주(蘇州)·진강(鎭江)·양주(揚州)·제녕(濟寧)·임청(臨淸)을 거치는 수천리 길이었다. 각 지방을 지날 때마다 최부는 심문을 받았다. 그는 그래도 상복을 벗지 않았고 고기와 생선·젓갈 등은 입에 대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한 상주로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릴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계속).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