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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47> 뜨거웠던 역대 전당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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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10·3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대표가 대한민국 제1야당을 이끌 수장으로 뽑혔습니다. 이른바 ‘빅3’로 불렸던 손학규·정동영·정세균 후보는 경선 기간 동안 상대 후보의 약점을 파고들며 끈질긴 공방을 벌였습니다. 7·14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안상수 대표와 홍준표 최고위원이 맞붙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치인들은 “당내 선거가 진짜 선거”라고들 말합니다. 선거에 달통한 사람들끼리의 경쟁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치열했던 역대 전당대회를 인물을 통해 짚어봤습니다.

허진 기자

1952년 3월 20일 이승만 재집권 위한 ‘당수 추대식’

이승만 전 대통령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20일 부산 동아극장에서 열린 제1차 자유당 전당대회. 치열하게 경쟁하는 요즘의 전당대회와 달리 이날 전당대회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위한 ‘당수(黨首)’ 추대식이었다. 이 대통령은 수순에 따라 당수로 추대된 뒤 ‘자유당원이 가질 마음’이란 메시지를 전했다. “내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정부를 못 만드는 것이니 백성이 먼저 청결한 다음에는 정부가 청결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다른 참석자가 대독한 이 대통령의 말은 당선 소감문이라기보다 아직 깨우치지 못한 당원들을 가르치는 교시(敎示)에 가까웠다. 당시 일부 언론이 ‘타일러서 잘못이 없도록 경계하는 말’이란 뜻의 ‘훈사(訓辭)’란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범석 부당수의 격려사에서도 이 대통령의 당시 위상이 드러난다. “이 박사의 노선과 교훈에는 비판을 가할 여지도 없이 무조건으로 추종할 각오이며….”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자유당은 이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한 필요에 의해 시작됐다. 48년 7월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은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후 국회가 자신의 재선에 우호적이지 않게 되자 이 대통령은 일반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에 의한 선출을 원하게 됐고, 이에 따라 전국적인 조직을 관리할 정당을 창당하게 됐는데 이게 바로 자유당이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둘러싸고 원내와 원외 인사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면서 자유당은 출발부터 삐걱거렸고, 한 간판 아래 두 정당,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이라는 기현상까지 연출됐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는 인사가 많은 원내 자유당보다 원외 자유당에 힘을 실어줬는데 그게 바로 52년 3월 20일의 전당대회였다.

1979년 5월 30일 YS, DJ 도움 받아 당 총재로

1970년 9·29 전당대회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김대중 후보가 경쟁자였던 김영삼씨와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영삼(YS)·김대중(DJ), 이른바 양김(兩金)이다. 두 사람은 진실로 “동지이자 경쟁자”(YS)라고 할 만하다. 60~70년대 박정희 정부에 맞서 이들이 함께했던 신민당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야당다운 야당’으로 평가받곤 한다.

두 사람의 치열한 경쟁과 협력관계가 두드러진 장면 중 하나가 70년 9월 29일의 전당대회다.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 채비에 들어간 박정희 대통령과 맞설 대선 후보를 뽑는 당시 전당대회에서 YS(43)·DJ(46)·이철승(48) 후보는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다. 당내 원로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깎아내렸지만 이 전당대회는 양김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DJ는 1차 투표에서 유진산 당수의 추천을 받은 YS에게 뒤지고도 2차 결선투표에서 이철승 후보를 지지했던 표를 모두 끌어와 승리하는 역전 드라마를 펼쳤다. DJ는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이로써 우리 당에 앞으로 새 발전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며 내년 선거에서 빛나는 민권승리의 역사가 창조될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YS는 이후 전국을 돌여 DJ 지지를 호소했다. 이듬해 대선에서 DJ가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석패했지만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졌다”는 말이 유행했다.

79년 5월 30일의 신민당 전당대회에선 DJ가 YS를 도왔다. YS는 1차 투표에서 이철승 당시 대표에게 졌으나 2차 결선투표에서 이기택 후보의 지지표를 자기 표로 만들어 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DJ는 적극적으로 나서 ‘비당권파 연합’을 주선해 경선 전날 김재광·박영연·조윤형 후보를 사퇴시켜 YS를 지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총재로 당선된 YS는 “이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개화하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투쟁하겠다”고 했고, 그해 10월 4일 ‘의원직 제명’이라는 탄압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22일 뒤 박정희 정부는 10·26 사건으로 종말을 맞게 된다.

2002년 4월 27일 ‘노풍’의 위력, 이인제 대세론 꺾어

노무현 전 대통령

2002년 4월 27일 오후 2시28분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노무현 민주당 고문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두 팔을 번쩍 치켜올렸다. 그러곤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이 기적을 만들어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8개월 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전당대회에선 대선 후보를 뽑는 지역 순회 경선의 마지막 순서인 서울 지역 경선과 당 지도부를 뽑는 경선이 함께 열렸다.

그해 3월 9일에 16개 시·도 지역 순회 경선이 시작되기 전까지 정치권에선 ‘이인제 대세론’이 우세했다.

이인제·노무현·김중권·한화갑·정동영·유종근·김근태 후보 등 7명이 민주당 경선에 나섰지만 결국 이인제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거란 전망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었더니 ‘노풍(盧風)’이 불었다. 초반에 제주(9일)와 울산(10일)에서 예상과 달리 노 후보가 선두로 나섰을 때까지만 해도 노풍의 위력이 얼마만큼 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6일 이 후보의 압도적 우세 지역으로 점쳐졌던 광주에서조차 595표를 얻은 노 후보가 491표를 얻은 이 후보를 누르자 점차 ‘노무현 대안론’에 힘이 실리게 됐다. 이후 이 후보가 유리할 것으로 예상됐던 강원에서조차 노 후보가 7표 차이로 이 후보를 이겼다. 김근태·유종근 후보가 사퇴한 데다 호남 출신 한화갑 후보에 이어 영남 출신 김중권 후보마저 사퇴하자 이 후보는 경선 구도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해 후보 사퇴를 고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미 19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 불복한 전력이 있는 이 후보로선 중도 포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7개 지역 경선을 더 치르며 노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4월 17일 경선 후보에서 사퇴했다. 노 후보는 이날 “나도 요즘 너무 빨리 상승해서 비행기 탈 때처럼 먹먹하고 멀리 여행을 간 것처럼 시차 적응이 잘 안 된다”고 말했다.

2004년 3월 23일 풍전등화 속 당권 잡은 박근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형국이었다. 선거를 불과 6개월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800억원이 넘는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상태였고, 3월 12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돼 ‘탄핵 역풍’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김무성·남경필·맹형규·원희룡·권영세 의원 등 초·재선 그룹의 소장파 의원을 중심으로 한 구당(救黨) 모임은 “한나라당을 해체해 새로 태어나야 한다”며 최병렬 대표를 중심으로 한 주류측과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 내분의 책임을 지고 최 대표가 물러남에 따라 열린 그해 3월 23일의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말 그대로 ‘비상시국’에서 치러졌다. 전국을 돌며 유세할 틈도 없이 세 차례의 TV 토론만으로 대표를 뽑았을 만큼 긴박했다. 5명의 후보들은 ‘2강(박근혜·홍사덕)-1중(김문수)-2약(박진·권오을)’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고, 관심은 ‘소장파가 미는 박근혜와 최병렬이 미는 홍사덕 가운데 누가 당권을 잡느냐’에 쏠려 있었다.

국민 여론조사와 대의원 투표를 절반씩 반영하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1, 2위 후보 간에 대의원만을 상대로 결선투표를 치르는 경선 방식을 택한 탓에 박 후보와 홍 후보는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박 후보는 1차 투표에서 단숨에 51.8%를 얻어 28.8%를 얻은 홍 후보를 제치고 당 대표에 선출됐다. 박근혜 대표는 당선 직후 “오늘부터 한나라당이 부패정당이라는 오명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출발했음을 선언한다”고 했고, 한나라당은 ‘반성’의 의미로 이튿날 여의도공원 옆 공터에 마련된 천막당사로 이사했다. 한나라당은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과반수 의석(152석)을 내줬지만 개헌저지선(100석) 이상인 121석을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당에 마지막 기회를 달라”는 읍소 전략이 통했다는 게 세평이었다.



178년 역사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의 두 인물

40대 닮은꼴 케네디·오바마
화합의 메시지로 경쟁자 포용

1832년 시작돼 178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을 두 명 꼽으라면 1960년의 존 F 케네디와 2008년의 버락 오바마를 들 수 있다. 이들은 48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났지만 40대의(케네디 43세, 오바마 47세) 젊음을 내세웠고 통합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왔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오바마가 케네디 이미지를 얻기 위해 벤치마킹을 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둘 다 옥외에서 대선 후보 수락연설을 했다는 점도 같다.

60년 7월 15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케네디는 낡은 기성정치의 해체와 ‘뉴프런티어’의 시대 정신을 주창했다. 그는 이날 후보 수락연설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미래에 있어야 한다. 세계는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시대는 끝났고 구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러면서 경선 과정에서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남부 출신의 린든 존슨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했다. 이를 통해 케네디는 미국 시민들에게 화합과 단결의 메시지를 던졌고, 남부 유권자들의 표까지 끌어모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케네디 대통령이 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중 암살되자 대통령에까지 올랐다.

2008년 8월 28일. 이날은 45년 전인 63년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민권법’ 통과를 촉구하며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행진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명연설을 한 날이기도 했다. 오바마는 같은 날 밤 후보 수락연설에서 “미국이 한 번 더 자유를 찾는 모든 사람들, 평화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최고의 희망이 될 수 있게 하겠다”고 역설했다. 오바마는 그해 11월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 지 232년 만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을 한 지 145년 만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바마는 그 자신이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고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경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에 임명, 화합의 이미지를 더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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