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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허(許)하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8호 04면

요즘 두 개의 기발한 시대극에 푹 빠져 있다. 하나는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요, 또 하나는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영화 ‘오오쿠(大奧)’다. ‘성균관 스캔들’은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정치 드라마, 혹은 성장 스토리로도 손색없는데,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남장여자’라는 설정을 통해 드러내는 남성 중심 조선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윤식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성균관에서 나가기를 종용하는 정약용에게 윤식은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께선 계집은 관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왜 이 모양인 걸까요.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지금까지 쭉 만들어 왔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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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오오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상상력을 보여 준다. 에도 막부 시대, 정체 모를 역병이 돌아 남자의 수가 급감하고, 강한 여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다. 막부를 이끄는 쇼군도 여자로 바뀌고, 개혁을 내세운 도쿠가와 요시무네(시바사키 고우·사진 왼쪽)가 제8대 쇼군 자리에 오른다. ‘오오쿠’는 막부시대 쇼군의 여자들이 머물던 궁. 이제 이곳은 여자 쇼군을 모시는 3000여 명의 미남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남녀가 역전된 세상, 예술의 한 장르가 돼 버린 검술에 정진하던 청년 미즈노 유노신(니노미야 가즈나리·사진 오른쪽)은 가난한 집안을 구하기 위해 오오쿠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성균관 스캔들’의 핵심이 성균관의 꽃미남 유생들인 것처럼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 역시 오오쿠를 가득 메운 ‘이케맨(미남) 군단’이다. 다마키 히로시, 오쿠라 다다요시 등 아름다운 배우들이 다수 등장해 “오오쿠의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쁜 얼굴과 처세술”이라는 대사대로 쇼군의 선택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남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남자아이들을 부잣집에 팔아 넘기는 부모들의 이야기나 데릴사위로 들어간 집에서 쫓겨나 오오쿠에 오게 된 남자들의 사연 등 말 그대로 ‘남녀 역전’의 상황 묘사가 흥미롭다.

하지만 단순히 역할만 뒤바꿔 놓은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의 실체를 설득력 있게 그려 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사랑하는 남자를 오오쿠에 들여보낸 거상의 딸 오노부(호리키타 마키)의 대사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견딜 수 있어. 힘은 남자가 세지만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게 강하니까’.

쇼군 자리를 둘러싼 여자들끼리의 권력싸움을 통해 권력의 변하지 않는 속성을 드러내면서도 극의 하이라이트에서는 여성 쇼군이기 때문에 가능할 법한 ‘포용적·합리적 리더십’을 보여 주기도 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오오쿠’의 원작자 요시나가 후미는 남자들만 대거 등장해 그들끼리 사랑하는, 즉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에 탁월한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민규동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역시 그의 만화가 원작이다. 그런 만큼 ‘오오쿠’에도 꽤 강한 동성애 코드가 등장하는데 ‘성균관 스캔들’의 ‘걸호-대물 추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재미있는(?) 발견 하나. 영화 ‘오오쿠’를 보다 놀라운 일본어를 하나 찾아냈다. 바로 ‘멘쿠이(面食い)’라는 표현이다. 잘생긴 남자만 밝히는 쇼군에 대한 묘사에 등장한 이 단어의 뜻은 ‘얼굴이 고운 사람만을 좋아하고 탐함, 또는 그런 사람’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얼굴 먹기’가 되니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라는 한국식 표현과 신기하게 상통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아이돌과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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