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50. 축구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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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고 축구선수 시절의 필자.

내가 축구선수로 뛰던 1953년 무렵의 배재고는 학교 이미지가 거친 편이었다. 축구.럭비.역도.농구 등 스포츠 분야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지만 공부 쪽에서는 밀렸다. 다른 학교 학생과 싸움이 붙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아 '2류'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창 축구에 빠져 수업을 등한시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훈육주임이 운동부원을 모두 소집했다. "앞으로 연습을 핑계로 수업을 빼먹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학과 성적이 평균 80점을 넘지 않으면 운동부에서 제외하겠다." 학교 차원에서 대대적인 이미지 쇄신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운동과 싸움만 잘하는 학교'라는 눈총에서 벗어나 반듯한 이미지로 교풍을 세우겠다는 의지였다.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 같았다. 다시 책을 붙잡자니 너무 아득했다.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동북중.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동북은 이북 출신인 이계하 이사장이 53년 지금의 서울 장충동 소피텔 앰배서더호텔 건너편에 세운 학교였다. 신설 학교로서 이름을 가장 빨리 알리는 데는 뛰어난 축구팀을 갖는 것이좋다고 판단한 이 이사장은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선수를 데려왔다. 학비 면제는 물론이고 1년 내내 숙식을 제공한다고 했다. 학과 성적을 묻지 않는 건 당연했다. 친구 집에서 묵고 있었던 데다 '평균 80점'이라는 새로운 올가미를 눈앞에 두고 있던 내게는 동북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학교 같았다. 종암동의 큰 한옥을 빌려 중.고교 선수 각각 15명이 합숙했다. 식사도 쇠고기에 쌀밥이었고 수시로 교통비 명목으로 용돈도 주었다.

이 이사장은 가끔 선수들을 집으로 초대해 격려하기도 했다. 이러니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우승은 떼어논 당상이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한솥밥을 먹으면서 공만 차니 우승을 못하면 그게 이상했다. 이후 동북은 축구 강호로 자리잡아 청소년.국가 대표의 절반 이상을 배출할 정도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 국가대표를 지낸 조윤옥.김삼락.박승옥.박이천.이낙원.이회택.홍명보 등이 동북 출신이다.

이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경기가 있다. 제35회 전국선수권대회였던 것 같다. 서울대표로 선발된 우리는 청주상고와 첫 경기를 벌였다. 그러나 상대를 얕보고 자만했는지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센터포워드로 공격수였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마침내 종료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내게 천금 같은 기회가 왔다. 골대를 향해 오른발을 마음껏 내질렀다. 축구화에 전해지는 느낌이 '골인'이었다. 그러나 공은 왼쪽 골포스트를 맞추더니 그대로 튀어나왔다. 곧 이어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0 대 0 무승부였다. 예선은 연장전이 없어 추첨으로 승부를 가렸는데 결국 지고 말았다. 마치 나 때문에 진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학교로 돌아와 '다시는 공을 안 찬다'며 도끼로 축구화를 찍자 동료들이 말리던 기억이 난다.

졸업 무렵 신흥대(현 경희대)에서 동북 출신 선수를 모두 스카우트하겠다고 했다. 입학금도 면제였다. 그러나 나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기마다 내는 수업료가 없었던 것이다. 장돌뱅이로 번 돈도 바닥난 지 오래고, 손을 벌릴 만한 친인척도 없었다. 이후 한동안 축구장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내가 뛰고 있어야 할 그라운드에 다른 선수가 달리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분하고 눈물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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