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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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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편히 잠 못 드는 모진 팔자가 있다. 생전에 ‘빈자(貧者)들의 성녀’로 추앙받던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이 그랬다. 그녀가 서른셋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등지자 온 나라는 슬픔에 몸부림쳤다. 대통령 관저로 인파가 몰려들며 밟혀 죽은 이만 여덟이다. 성대한 국장이 끝난 뒤 자유의 여신상보다 더 큰 기념 조각을 세우고 그 아래 방부(防腐) 처리된 에바의 시신을 안치키로 했다.

페론 대통령이 쿠데타로 축출되며 사달이 났다. 감쪽같이 사라진 시신은 16년이나 행방이 묘연했다. 알고 보니 바다 건너 이탈리아 지하 묘지에 남의 이름으로 묻혀 있는 게 아닌가. 페론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이 집권하고 나서야 겨우 고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서운할 구석은 남아 있다. 두 번째 부인인 그녀는 가톨릭 관례 탓에 남편 곁이 아닌 친정 가문 묘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여전히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피플 파워’로 쫓겨난 그는 망명지인 미국 하와이에서 루푸스 합병증으로 숨졌다. 끈질기게 요청한 지 4년 만에 시신은 고국에 돌아왔지만 “독재자를 영웅 취급할 수 없다”며 국립묘지 안장은 거부당했다. 가족과 지지자들이 “다른 대통령은 다 되는데 왜 마르코스만 안 되느냐”며 지금껏 맞서는 중이다. 고향집 유리관 속에 임시로 누운 마르크스의 귓전이 어지간히 시끄러울 터다.

좋은 자리 골라 고이 잠든 유해를 굳이 국립묘지로 옮기려다 말썽이 나기도 했다. 올해로 서거 50주년을 맞은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 얘기다. 소도시 루르마랭의 언덕에 묻힌 그를 프랑스 정부가 흔들어 깨우려 했다. 앙드레 말로·빅토르 위고 등 위대한 지성들이 대거 잠든 ‘팡테옹’으로 이장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반발이 거셌다. “일평생 반골로 산 카뮈를 주류(主流)의 성전에 편입시킨다니!” 우파 정부가 고인을 모욕한다며 좌파 쪽에서 야단한 것이다.

분분한 논란 끝에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어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이승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에 저승에서조차 편히 못 쉴까 싶어 안타깝다. 어차피 그곳은 잠정적 거처 아니겠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가나/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또 어떻게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분단을 안타까워한 시를 남겼던 그가 진정 눕고 싶은 자리는 통일된 고향일 테니.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