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윤이상] 下. 오선지에 써 내려간 통일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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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윤이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민족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힘쓴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윤씨가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3년 4월. 이때 강서고분의 사신도(四神圖)를 보고 감명 받아 실내악곡 '이미지'(68년)를 작곡했다. 이 곡에 등장하는 플루트.오보에.바이올린.첼로는 각각 현무.청룡.주작.백호를 상징한다.

그러나 윤씨의 북한 방문이 부쩍 잦아진 것은 동백림사건 이후다. 김일성은 90년 윤씨를 위해 평양 근교에 개인 별장까지 마련해주었다. 평양에서 요양할 때는 주치의와 간호사를 배치했고 수십 년 된 산삼까지 보냈다. 북한에서 53부까지 제작된 영화 '민족과 운명'중 4회분의 주인공이 윤이상인 것에서도 그에 대한 '특별대우'가 읽힌다. 여기에는 당연히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윤이상음악연구소 이창구 부소장은 94년 3월 이 연구소가 발행하는 계간 '음악세계'13호의 부록 '오늘의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윤이상 음악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토양과 인간성은 민족을 무시하고 민생을 외면하는 극단적인 추상화와 지능화에 경종을 울렸으며, 세기말적 종착점에 이른 유럽의 '전위음악'에 재생의 희망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윤씨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칸타타 '나의 땅 나의 조국이여'도 서울에 앞서 평양에서 연주했다.

윤이상씨는 남북 합동음악회를 여러 차례 제의하는 등 남북 문화교류에 앞장서왔다. 87년과 88년 일본에 체류할 때 남북한 정부에 '민족 합동음악축전'을 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89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열린'제8차 윤이상 음악회'에 참가해'사상과 신앙을 초월해 누구나 다 부를 수 있는 통일가요를 창작.보급하자'고 제안했다. 이 작업을 윤이상연구소가 맡아 내놓은 것이 '통일노래 100곡집'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어렵다고만 인식되던 윤이상의 음악을 대중화하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다음달 18일 열리는 윤이상 평화재단 창립 기념 음악회(서울 호암아트홀)에서는 인디밴드 '버튼'이 윤이상의 '투게더'를 전자악기를 곁들인 25분짜리 음악으로 편곡해 연주한다. 윤이상의 관현악곡을 실내악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윤이상의 음악은 남북 문화교류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윤이상음악연구소와 교류할 '국립음악연구소' 또는 '한국음악정보센터'를 설립해 윤이상을 포함한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곡을 수집.연구하자고 주장한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는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는 남한 음악에 대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음악가들의 성향까지 파악해 놓았을 정도"라며 "남북 음악 교류와 통일 이후의 음악정책을 위해서라도 연구센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이상 평화재단 창립을 앞두고 20일 서울을 방문한 윤씨의 딸 윤정(55)씨는 "윤이상음악연구소에는 20여년간 축적해온 연구 논문과 연주 노하우가 있다"며 "남북 간에 음악 교류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윤씨의 작품을 연주하려면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부지 앤 혹스 출판사에서 악보를 구입하거나 빌려야 한다. 재독 작곡가 진은숙(44)이 소속된 출판사다. 서구에서 윤이상의 작품이 널리 연주될 수 있는 역할도 하는 만큼 아쉬워할 대목은 아니다. 게다가 국내에는 저작권까지 관리하는 음악 전문 출판사가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친필 악보는 문화재적 가치가 점점 높아질 것이 확실한 만큼 일부라도 서둘러 구입해 공공 자산으로 관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윤이상씨가 20여년간 살았던 베를린 근교의 자택을 윤이상 기념관으로 만들어 한국음악의 유럽 진출 전초기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뮌헨 올림픽조직위에서 오페라 '심청'의 작곡을 의뢰받고 작품료로 받은 100만마르크(약 6억5000만원)로 구입한 집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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