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49. 장돌뱅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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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이준상(左)과 필자는 단짝이였다.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친구 이준상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무일푼인 데다 당장 기거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입학은 잠시 미루고 일단 돈을 벌기로 했다. 마침 준상의 아버지 친구 중에 신설동에서 가게를 하는 분이 계셨다. 만국기와 한복 장식물 등을 파는 잡화상이었다.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장돌뱅이를 하라고 하셨다. 경기도 일대 5일장을 돌아다니며 자기네 물건을 팔라는 것이었다.

찬밥 더운 밥 가릴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당장 박스에 튼튼한 끈을 달아 어깨에 메고는 장삿길에 나섰다. 의정부.동두천.포천.봉일천 등을 번갈아 다니며 그곳 가게에 물건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변변한 교통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종로 5가에 가면 군용 트럭을 개조해 서울과 의정부 일대를 오가는 차가 있었다. 쌀가마니 같은 짐들과 섞여 덜컹거리며 시골길을 달렸다.

그렇게 겨우겨우 밥벌이를 하던 어느 날 의정부의 한 가게 주인이 불렀다. "학생들 이리 좀 와 봐. 너희 서울서 왔지? 그동안 쭉 지켜봤는데 똘똘하게 일 잘하는 것 같네. 내 부탁 좀 들어줄래?" 전쟁 중이라 물자가 태부족이었던 당시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공공연하게 암거래되고 있었다. 지금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미군 PX(군대 내 매점)본부가 있었다. 그 주변엔 손톱깎이를 비롯해 군화.군복.단검.양담배 등을 파는 도매상이 즐비했다. 이 도매상을 통해 다시 방방곡곡으로 물건이 팔려나갔던 것이다.

의정부 가게 주인의 부탁인 즉, 서울 도매상에 가서 자기가 적어준 물건을 사다주면 수고비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주인 입장에서는 번거롭게 서울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니 시간과 교통비가 절약되고, 우리는 어차피 가는 길에 물건을 배달해주고 가욋돈을 버는 셈이었다. 소문이 돌자 다른 가게에서도 부탁해왔고, 우리가 먼저 심부름해주겠다고 제안한 적도 했다. 그러면 다들 잘됐다며 반색했다. 이렇게 '거래처'가 늘면서 주머니가 점점 두둑해졌다. 나중에는 아예 우리가 도매상에서 싸게 물건을 받아 가게들에 팔고 차액을 챙기기도 했다. 나한테 이런 장사 수완이 있나 싶을 정도로 벌이가 좋았다. 당시 서울 신설동의 10여평짜리 집값이 1만여원 했는데, 장사한 지 약 여섯달 만에 그런 집을 서너 채 살 돈을 모았다.

그러나 우리가 장돌뱅이를 하려고 서울에 온 건 아니었다. "준상아, 이 정도면 몇 년간 학비도 되고 먹고 살 수도 있겠다. 우리 학교 가자." 그땐 한 학교에서 중.고 과정을 다 가르쳤다. 예를 들어 내가 다닌 학교는 중앙중.고, 준상이는 용산중.고였다. 중앙에 찾아갔더니 학교 측은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했다. 한 학기가 지났기 때문에 다음 학기에 1학년으로 다시 입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년 뒤처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중학교 졸업 동기생들을 2학년 선배로 '모셔야' 한다는 게 싫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준상이도 싫다고 했다. "우리 이왕 1학년으로 들어갈 거면 다른 학교로 가자. 배재 어떠니?" 어릴 때부터 발재간이 좋아 학교 축구대표로 뛰었던 나는 당시 축구명문이던 배재에 입학했다. 축구부에 들어간 나는 공에만 매달려 수업을 점점 멀리했다. 선생님들도 축구부원은 간섭하지 않아 오전 수업만 하거나 아예 온종일 수업을 빼먹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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