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세금 같은 공탁금 수익 1350억원‘수상한 집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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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공탁금 운용수익금을 관리하는 공탁금관리위원회로부터 지난 3년간 1350억여원을 출연금으로 받아 회계감사 등을 받지 않은 채 방만하게 집행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본지가 감사원과 국회 법사위 소속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 등을 통해 대법원 공탁금관리위원회의 2008, 2009년 결산보고서와 2008~2010년 출연금 내역 등을 입수해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한 결과 드러났다. 출연금은 법원 공탁금을 관리하는 11개 금융기관이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금 형식으로 공탁금관리위원회에 내놓는 것이다. 법원의 출연금 사용 실태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관리위는 2008년부터 올해까지 금융기관에서 전달받은 전체 출연금 1555억원 가운데 87%인 1350억여원을 대법원에 배정하고, 나머지는 대한법률구조공단, 대한변호사협회,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등 5곳에 건넸다. 이번 결산보고서 분석에는 국가예산 집행 감사를 수년간 해왔던 이화여대 행정학과 박정수(조세연구원 공공기관 정책연구센터장) 교수와 공익법인 회계 전문가 최호윤 회계사가 참여했다.


◆활성화비 등 애매한 내역에 수십억 집행=박정수 교수는 결산보고서에 모호한 내역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2008년의 경우 대법원은 국선 변호인 교육 및 국선 변호 활성화 비용으로 18억7000만원, 조정위원 교육 및 활성화 비용으로 5억1000만원 등 교육 또는 활성화 비용 등으로 90억원 넘게 받아 썼다. 2009년에도 같은 항목으로 30억원가량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변호인 교육비가 뭔지, 활성화·홍보 비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또 위원회가 의결한 공익사업비 명목으로 3년간 400억원 가까이 집행했다. 여기에는 ‘방문 민원 안내’나 ‘민원인 편의시설 개선’ ‘사법제도 연구’ 등이 포함돼 있다. 박 교수는 “공익사업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사실상 법원이 모자라는 예산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집행 내역 전 항목 집행 잔액 0원=회계상에도 여러 문제가 드러났다. 위원회 모든 지원 사업의 지출 예산액과 실제 지출액이 모두 같아 집행 잔액이 전 항목에서 0원으로 돼 있다. 대법원이 달라고 하면 위원회는 모두 돈을 내줬다는 얘기다. 최호윤 회계사는 “공익법인 회계 감사를 18년 동안 해왔지만 돈을 나눠주는 배분기관의 집행 잔액이 모두 0원으로 돼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고 밝혔다. 특히 대법원은 2008년에 받은 돈 가운데 일부를 남겨 다음 해로 넘겼다. 그런데 2009년에 역시 위원회의 지출 내역에는 대법원에 대한 모든 집행 잔액이 모두 0원으로 돼 있다. 최 회계사는 “쓰고 남은 돈을 이월했다면 다음 해 그 항목에 대해서는 지출 예산액보다 적은 액수가 지출되는 게 보통”이라면서 “위원회가 대법원 집행 내역에 대해 모르거나 감시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이월액에도 의혹은 많다. 예를 들어 국선 변호 지원 명목으로 2009년에 147억여원을 지출했는데 올 1월 한 달 동안 이월금 34억8000여만원을 사용한 것 등이다. 한 달 만에 전년도 사용분의 4분의1가량을 썼다는 얘기다.


◆일반예산과 출연금 60% 중복=대법원이 정부로부터 받는 예산과 출연금의 사용 내역이 60% 이상 중복된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받은 출연금 가운데 총 342억원을 썼는데 이 가운데 214억원은 일반 예산과 같은 항목이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일부 항목의 경우, 일반예산에 잡힌 돈보다 출연금에서 나온 돈을 먼저 쓰고 일반예산은 남겨 다른 용도로 쓴 흔적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출연금은 공탁위원회의 지원금으로 국가 예산이 아니다”는 이유로 위원회에 대한 감사원 감사도, 외부기관의 회계감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증여세법에 따르면 자산 100억원 이상의 공익 법인은 매년 회계 감사를 받아야 한다. 사법부 최고기관이 실정법을 어긴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감사원의 감사나 자료 공개를 거부한 일은 없으며 외부 회계감사가 의무사항인지는 몰랐다”고 해명했다.

전진배 기자

◆공탁금=민·형사상 다툼이 벌어질 때 법원에 맡겨놓는 돈이다. 주로 소송에서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거나 채무자가 돈을 갚으려 하는데 채권자를 찾기 어려울 때 공탁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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