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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푸른 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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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집행관 둘이 재빠르게 도씨 팔을 양쪽으로 끼고 나무의자로 이끌었다…사형수의 눈이 반쯤 감긴 채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고, 팔걸이에 얹혀진 두 손이 연방 떨어댔다. 교도관 하나가 사형수 머리에 흰 두건을 씌웠다. 평화적인 남북통일 만세! 도씨가 속으로 부르짖었다. 계급착취 없는 사회정의 실천, 국민복지를 달성하는 국가로 이 나라를 새롭게 건설하자…집행 교도관 하나가 레버 손잡이를 힘껏 끌어당겨 내렸다. 밧줄에 매달린 사형수의 몸이 지하 구덩이로 떨어졌다…일분 삼십초를 넘기자 촛불이 꺼져 어둠이 덮치듯 도씨의 의식이 사라졌다."

김원일의 연작 소설집 '푸른 혼'에 나오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수괴' 도운종이 사형당하는 장면이다. 이 책은 1974년 대법원 판결 하루도 못 돼 사형당한 사건 주인공 8명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주변사람들은 묻혀 있던 내막을 처음 공개하는 '논픽션'이라고 받아들인다. 소설 속에서 도씨는 '진보적 꿈을 꿨다'는 이유로 사형에 이르게 되며 바로 그 때문에 독자들을 울분케 한다.

도운종의 실제 모델인 도예종은 64년 인혁당 사건 때 '별 혐의 없이' 3년간 투옥됐다. 67년 석방된 그는 대구에서 삼성토건회사.선아기업회사 전무 등을 지내다 72년 삼화건설 회장이 됐다. '평범하게' 살던 그는 73년 4월 19일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됐다.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에서 달포에 걸친 '고문' 뒤 그는 인혁당 재건위의 핵심인물로 '등장'했다. 대법원은 75년 4월 8일 오전 10시 피고 궐석 상태에서 재건위 관련자 7명, 민청학련 관계자 1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이들은 4월 9일 오전 4시15분부터 사형대에 끌려나왔다. 8명이 두 시간 사이 20분 간격으로 처형됐다. 도씨는 두번째다.

그러나 당시 수사 발표는 크게 다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조종, 국가를 뒤엎으려 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23명이 구속돼 8명은 비상보통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것이다.

숱한 자료를 섭렵했다는 '푸른 혼'과 당시 수사발표 중 어느 쪽이 옳을까. 국정원이 최근 재조사하겠다고 발표한 7대 과거사 중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포함돼 있다. 기왕에 하는 작업이니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길 기대한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