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48. 다시 서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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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배재고에 다니던 시절의 필자(오른쪽에서 둘째).

부산 피란시절을 돌이켜보면 한국인의 심성이 참 곱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전쟁으로 모든 게 부족하고 팍팍한 가운데서도 인정만은 넘쳐났다. 내가 겪었던 사람들. 예컨대 오갈 데 없는 나를 어여삐 여겨 미군 군수품을 팔도록 연결해 준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나, 자기 가게 옆에서 사과 궤짝을 놓고 장사를 하도록 허락해준 함경도 아주머니만 해도 그렇다. 자기만 살겠다고 아등바등 했다면 그런 여유가 우러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산 사람들도 얼마나 고마운가.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들 때문에 무허가 집들이 난립해 도시가 어수선해지고, 자기들 일자리가 줄어들 판이었는데도 특별히 타지 사람이라고 해코지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부산보다 덜 몰렸지만 목포나 여수.대구처럼 피란 행렬이 거쳐 간 지역에서도 별다른 불상사 없이 서로 다독거리며 살았던 걸 생각해보면 '지역감정'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다 훗날 정치인이 지어낸 게 아닌가 싶다.

국제시장에서 미군 물품을 팔면서 돈맛을 알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어디선가 "너, 태원이 아니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군용 지프에서 큰형이 내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자리를 박차고 뛰어가 형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천애고아처럼 외톨이로 떠돌던 그간의 설움이 북받쳐 오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서부전선에서 1사단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형은 1.4 후퇴로 부산까지 내려와 군목(軍牧)의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형도 PX에서 빼낸 군복 바지를 팔러 나온 것 같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형은 당장 장사를 접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넌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으니까 다시 학교에 가야 해."

그 말을 들으니 또 눈물이 났다. 그동안 교복을 입고 다니던 또래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던가. 서울에 있던 학교들이 부산에 천막교사를 지어 막 입학식을 한때였다. 내가 다니던 중앙은 보성중과 연합해 영주동에 임시건물을 세워 개교했다. 변변한 책상은커녕 의자도 없어 긴 나무의자에 여러 명이 앉아 공부했다.

보수동에 있는 형의 집은 말이 집이지 비바람을 막는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피란민 거처가 그랬듯이 가마니나 미군 레이션 박스를 뜯어 벽으로 삼고, 지붕은 검정 기름종이로 대충 얽어놓았다. 형은 군에 있을 때 만난 형수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채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활달한 성격의 형수는 내게도 잘 해주었다. 형수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닐 수 있어 한동안은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했다. 사춘기의 나이에 단칸방에서 젊은 부부와 함께 생활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밖으로 나도는 횟수가 늘었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자다 다음날 바로 등교하기도 했다. 보름 가까이 풀빵과 물로 지낸 적도 있었다. 마침내 중학교 졸업장을 받자 형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절대로 두 분께 불만이 있어 나가는 게 아닙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됐으니 서울로 가서 제 살 길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합니다." 형과 형수 앞으로 쪽지를 남기고는 대구로 향했다. 그 곳에는 어릴 적부터 각별했던 친구 이준상이 가족과 함께 피란 와 있었다. 용산중에 다니다 대구로 온 그도 친구가 없어 매우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야, 우리 서울로 가자." 내 제안에 그는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두말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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