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부모·연인 구해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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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회사원 홍모(33.여)씨는 최근 "사귀고 있는 애인을 보여달라"는 친구들의 성화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결혼을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채근에 그만 "남자 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홍씨는 고심 끝에 '역할 대행업체'를 찾았다. 업체 측은 100여명의 남자 사진을 보여주며 "20만원을 내면 '1일 남자친구'를 지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씨는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의 김모(29)씨를 선택한 뒤 친구들에게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라고 소개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자 친구와 결별위기에 놓였던 고시준비생 김모(29)씨는 대행업체를 통해 소개받은 '1일 어머니' 덕을 톡톡히 봤다. 자상한 인상의 도우미 염모(53)씨가 여자친구를 다독거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최근 인터넷 등에는 부모.자녀.연인 등의 각종 역할을 대신해 주는 서비스 업체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포털 사이트인 다음이나 네이버에 등록된 업체만도 30여개다.

결혼식의 하객을 대신해주는 등 '자리 채우기' 수준에서 시작했던 역할 대행업체들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맞선이나 동창회에 함께 갈 부모.연인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대행 역할의 난이도와 소요시간에 따라 요금은 다소 차이가 있다. 한두 시간에 끝나는 하객이나 조문객 대행은 1인당 4만~5만원 선. 연인 대행은 하루에 20만원 안팎이다.

실제 도우미들에게 돌아가는 일당은 요금의 50% 안팎이지만 일감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홈페이지를 연 R사는 관리하고 있는 도우미만 1000여명 수준. 회사 관계자는 "실업자가 느는 데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일의 성격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도우미로 신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업체는 대행인과 신청인이 서로의 사진.주소.전화번호 등 기초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애인대행의 경우 '손잡기'와 '팔짱끼기' 외에 신체 접촉을 제한하는 등 에티켓에 대한 규정도 두고 있다.

업체들이 난립하다 보니 성범죄 발생 등의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 C사 대표 김모(34)씨는 "애인대행 서비스에 대해 '성관계도 가능하냐'고 문의하는 남성들이 많다"며 "실제로 일부 업체는 익명 보장을 전제로 불법 영업을 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몇달 전 30대 회사원의 애인역할을 대행했던 한 도우미는 이 남자가 계속해 치근거려 일을 그만둬야 했다. 또 정모(33.여)씨는 "주말에 영화를 같이 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30대 남자의 주문에 따라 약속장소에 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이 남자가 "여관에 가서 영화를 같이 보자"며 사실상 성관계를 요구해 이를 거절하자 "미리 받은 20만원을 돌려달라"고 윽박질렀기 때문이다.

최근 애인대행 서비스를 이용했던 홍씨는 "도우미의 성격이나 수준을 전혀 알 수 없어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람을 고용해 친구나 부모의 눈을 속이는 세태에 대한 우려도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남들에게 부족해 보이지 않으려는 고독한 현대인들의 심리와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문화가 결합하면서 대행업체가 나온 것 같다"면서 "부모나 친구 간의 신뢰까지 무너뜨릴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임장혁.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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