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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6) 찾아온 고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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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왕우 보좌관은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내게서 보육원 이야기를 자주 듣긴 했지만, 그곳 출신 원생들로부터는 처음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보좌관은 즉시 내게 그 전화 내용을 알려줬다. 그들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연락망을 갖추고 서로 안부를 확인해왔던 것 같았다. 부모가 없는 대신에 그들끼리 서로 형제와 자매의 우애를 나누면서 이 세상을 살아왔던 모양이었다.

거의 60년 전의 일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소식이 매우 궁금했었다. 거친 총구에 몸과 마음을 다친 슬픈 짐승처럼, 어둡고 불안한 눈길로 포로수용소에 왔던 나를 쳐다보던 그들이었다. 이어 다시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만든 ‘백선 육아원’에서 전쟁이 남긴 상처를 가까스로 치유했던 그들이었다.

올해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백선 육아원’ 출신 남녀 몇몇이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백선엽 장군을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70세 전후의 이들은 58년전 육아원을 세워 자신들을 보살폈던 백 장군을 ‘대장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줬다. [변선구 기자]

그들은 나를 ‘대장 아버지’라고 불렀다. 내가 ‘백 야전전투사령부’를 떠나 2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을 때 별 넷의 대장 계급장을 달고서도 가끔씩 그들을 찾아가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광주 송정리의 육아원을 막 만들었을 때의 기억보다, 1년 뒤 ‘대장’ 계급장을 달고 육아원을 방문했던 때의 나를 더 기억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그런 과정에서 몹쓸 경우는 당하지 않았는지 다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은 5월의 어버이날을 전후해서 나를 찾아왔다. 젖먹이부터 중학생까지 나이가 다양했던 고아들은 벌써 늙어 있었다. 다소 구부정한 모습으로 내 사무실을 들어서는 그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 사무실 문을 들어서는 그들은 벌써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들 내 앞으로 다가와 나의 손을 잡으면서 울먹거렸다. “대장 아버지…, 안녕하셨죠? 그동안 찾아뵙지를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꺼내는 그들을 보면서 내 눈시울도 젖었다.

60년 전 그들과 함께 촬영했던 사진들을 꺼내 보여줬다. “어~, 저게 나야”라면서 어떤 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들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서 다시 만났다는 점에 깊이 감사했다. 그들과 다시 기념촬영도 했다. 그들은 “이제부터는 자주 찾아오겠다”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올해 어버이날에도 다시 나를 찾아왔다. 1년 전의 그 모습에 비해 몇몇은 그 사이에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나를 찾아온 그들이었지만, 와서 나를 볼 때마다 감회는 늘 새로운 모양이었다.

헤어진 뒤 해가 지나서 이뤄진 두 번째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역시 울음을 참지 못했다. 사무실에 들어선 그들은 30여 명. 들어서면서 “안녕하셨어요?”라면서 큰소리로 인사를 하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하나가 “대장 아버지, 자주 찾지 못해 죄송합니다…”면서 울먹이자 금세 모두들 눈물을 글썽거렸다.

원생들에게 고등학교 과정까지 이수토록 했던 육아원의 분명한 원칙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잘 자랐다는 느낌을 줬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 아들딸 잘 키우고 손자까지 볼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6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오면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적지 않은 설움과 원망이 맺혀져 있을 것이었다. 누구는 벌써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고, 누구는 힘겹게 살면서 제 부모가 지닌 경력을 내놓고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나를 찾는 모임에 빠졌을 것이다.

이들 또한 한때 ‘아버지’라고 불렀던 나를 찾아오는 데 많은 시간을 망설여야 했으리라고 본다. 찾아가 재회하는 기쁨은 잠시지만, 어두운 저편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결국 육아원의 원생들은 나를 찾아왔다.

그런 그들은 아주 밝았다. 어엿한 교육공무원으로 지내다가 은퇴를 했다는 한 원생은 “제 아들이 중앙부처 공무원입니다”라면서 자랑을 늘어놓았고, 이를 듣던 한 여자 원생은 “제 아들은 명문대 졸업생이에요”라면서 맞장구를 놓기도 했다.

우리는 음식점에서 조촐한 파티를 했다. 그들은 내 가슴에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줬고, 자신들의 경험담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 나이 이제 90이었고, 그들은 60대 초반에서 70을 갓 넘은 중늙은이였지만 나를 아버지로 여기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미 벌어진 상처였다. 그것을 어떻게 치유하느냐가 중요했다. 이미 벌어진 상처를 두고 그것이 생겨난 연유만을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 누군가 먼저 나서서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그 마음을 위로하는 일이 중요하다.

작지 않은 마음의 부담을 떨쳐 버리고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자랑스럽게 살아온 이들 원생 출신들이 고마웠다. 그런 점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마감하며 지리산 인근을 떠돌면서 온갖 냉대와 설움을 받아야 했을 이 고아들을 보살핀 게 다행이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이름 아래에서 이들을 보살폈던 부하들과, 이들을 도우려 애썼던 미국인들에게 감사한다.

다시 만난 원생들과 나는 식당에서 함께 유쾌한 점심을 즐겼다. 그리고 그날의 조촐한 행사를 마감할 무렵에 우리는 기념촬영을 했다. 내 옆에 있던 한 원생이 이런 말을 했다. “대장 아버지, 그때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올 때 봤던 아버지의 발이 아니에요. 그땐 군화가 아주 커 보였는데, 지금 보니까 발이 아주 작으시네요. 대장 아버지 정말 왕발이셨는데….”

그러자 원생 출신 모두가 내 발을 들여다봤다. 다들 그런 표정이었다. “정말 아주 작으시네…”라면서 몇몇이 거들고 나섰다. 그러고서는 우리 모두 함께 큰소리로 웃었다. 60여 년 전의 상처는 정말 아주 컸다. 그러나 그를 잘 딛고 일어선 우리들의 눈에 그 상처는 지금의 내 발처럼 아주 작아졌다는 느낌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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