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준 고래고기, 조선인 인육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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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일제 강점기 남태평양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식인 만행에 분노해 저항하다 학살당한 사실이 정부 조사 결과 처음 확인됐다. 식인 사건에 관해 생존자 증언이 나온 적은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 것은 처음이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5일 ‘밀리환초 조선인 저항사건과 일본군의 탄압 진상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조선인 생존자 증언과 일본 측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42년 초 조선인 800여 명은 군사시설을 짓기 위해 남태평양 마셜 제도의 동남쪽 끝에 있는 밀리환초로 강제 동원됐다. 1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이곳은 태평양전쟁 당시 군사적 요충지였다. 원주민 500여 명이 살던 섬들에 당시 5000명이 넘는 일본군과 조선인이 몰렸다. 게다가 미군의 공격으로 44년 6월부터 보급마저 끊기면서 일본군은 식량 채집이나 어로로 연명했다.

식량난이 한창이던 45년 초 일본군은 ‘고래 고기’를 조선인들에게 먹였다. 그러나 며칠 뒤 근처 무인도에서 살점이 도려진 채로 살해된 조신인 시체가 발견됐다. 동료들이 자꾸 사라지는 걸 이상하게 여겼던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동료들을 죽여 자신들에게 먹인 사실을 눈치챘다.

분노한 조선인 120여 명은 45년 2월 28일 이들을 감시하던 일본인 7명을 숲속으로 유인해 살해했다. 보고서는 이 봉기가 식인 사건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 거사에 성공한 뒤 미군에 투항하려던 조선인들은 다음날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토벌대에 학살당했다. 당시 야자나무 위로 피신해 목숨을 건진 이는 겨우 15명 정도다. 이들의 증언으로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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