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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화첩 돌려준 독일 성오틸리엔수도원 출판부 대표 세이프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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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 덕수궁을 거닐며 퀴릴 세이프 신부는 “한국의 자연과 사람들, 그 문화를 더 많이 알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한국은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어 유럽보다 더 흥미로워요. 종교뿐 아니라 공자나 노자처럼 위대한 사상의 전통이 사람들 삶에 녹아있는 것도 놀랍고요. 그런 인류 지성의 두터운 결을 문화교류를 통해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덕수궁에서 만난 퀴릴 세이프 신부(44·독일 성오틸리엔 수도원 EOS 출판부 대표)는 신학과 문학을 전공한 비교종교연구가답게 한국 종교와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성서 옆에 논어 놓고 논어 옆에 성서 놓고』(최기섭·김형기 지음, 성서와 함께 펴냄)의 독일어판 『Jesus und Konfuzius(예수와 공자)』 출간을 기념해 서울에 온 그는 “더 많은 지혜를 모아 소통시키는 것이 현대 종교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세이프 신부의 신념은 방한기간 중 그가 한 강연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9월 28일 서울 도선사에서 ‘들어서, 읽으라!-법화경과 성경 속에 묻힌 보물’, 29일 출판기념 심포지엄에서는 ‘유럽에서 『예수와 공자』가 왜 필요한가?’를 강의하며 그는 “문화 간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몇 년 전까지 우리 출판사에서는 유교에 관한 책은 낼 수 없었어요. 그러던 중 프랑스 번역본으로 『성서 옆에…』를 읽게 됐죠. 아주 긍정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경전 간의 대화로 세계의 다문화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한 예로 공자와 예수의 정치에 대한 사유를 들었다. 공자는 ‘정치는 지도자의 인품에 따라 규정된다’고 했다. 예수는 ‘너희 중에 지배자가 되려는 자는 먼저 모두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유교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사고의 공통점은, 정치는 정치 시스템과 무관하게 정치인들의 성품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세이프 신부가 속해 있는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우리에게 2005년 겸재 정선(1676~1759)의 국보급 화첩을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려준 것으로 낯익다. 이 화첩은 수도원의 총원장으로서 1911년과 25년 두 차례 조선을 방문했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7) 신부가 구입해 수도원에서 80년 이상 소장해왔다. 베버 신부는 당시 체험한 조선의 천주교 실태와 생활상을 기록한 책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분도출판사 간행 예정)와 『수도사와 금강산』(푸른숲 펴냄)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에는 조선의 풍물을 담은 희귀한 흑백·컬러 사진 290여 장이 실려 있는데 그 원판 사진이 수도원에 남아있다. 국립민속박물관 등 몇 군데서 이 원판 사진의 국내 전시를 추진했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한 상태다.

세이프 신부는 “우리 수도원 측으로서는 그 원판 사진의 한국 전시에 적극 협력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했다. 선교를 위해 전 세계에 파견된 신부들이 각 대륙과 지역에서 수집해온 유물 또한 문명 간의 대화이기에 수도원 박물관에서 늘 공개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그는 해마다 EOS 출판사에서 펴내는 책 종수가 50~60권이 되는데 한국 출판물의 번역 작업이 더 많이 이뤄지길 기대한다며 “몇 년 뒤 한국 왜관 성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운을 남겼다.

글=정재숙 선임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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