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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학교 너무 비싸 … 가족 보내고 기러기 아빠 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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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자녀 교육과 영어 인프라, 그리고 비자 문제. 한국에 일하러 온 외국인 전문인력에게 직접 물었더니 가장 많이 꼽은 세 가지 고충이다. 이른바 외국인 전문인력의 3고(苦)다. 서울시가 지난해 말 서울에 사는 외국계 금융업 종사자 80명을 조사한 결과도 이와 비슷했다. 이들 중 한국의 언어 환경에 만족한다고 답한 이는 15%, 교육환경에 만족한다고 답한 이는 20.1%에 불과했다. 주거 환경(70%)이나 교통환경(65%) 만족도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외국의 우수 인력이 왜 한국에서 근무하는 것을 기피하는지 알아봤다.

자녀 교육 국내 한 철강회사의 40세 인도인 연구원은 올 초 아내와 딸을 다시 인도로 보냈다. 일곱 살 난 딸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어서다. 가족과 헤어지기 싫어 국내 외국인학교를 알아봤지만, 연간 학비가 2000만원에 육박했다. 자신의 연봉 3분의 1 정도가 고스란히 들어가는 것이다. 회사 측에선 다른 근로자와의 형평성 문제를 들어 지원에 난색을 표했다. 그는 결국 기러기 아빠가 됐다.

외국인학교는 수도 적고 수업료가 턱없이 비쌌다. 그렇다고 한국 학교를 보내자니 아이 피부색과 언어가 걸림돌이었다. 자녀를 둔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민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국 외국인학교는 모두 46곳. 그나마 서울에 17곳이 몰려 있고 전남·경북·제주 지역엔 한 곳도 없다. 연간 평균 수업료도 1045만원(유치원)에서 1978만원(고등학교)으로 봉급생활자가 부담하기엔 벅찬 수준이다.

그렇다 보니 자녀를 교육시킬 연령대의 외국인 전문인력은 한국에 오길 꺼린다. 이런 현상은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전임 교원들의 연령대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홍익대·고려대·우송대 등 외국인 전임 교원을 많이 보유한 상위 5개 대학을 분석하니, 외국인 전임 교원의 절반 가까이(45.1%)가 30대 이하였다. 같은 나이대의 한국인 교원 비중은 13.4%에 불과했다. 올 7월까지 서울대 교무처장을 지낸 김명환(수리학과) 교수는 “중·고생 자녀를 둔 40~50대 교수들은 지원을 꺼리거나, 교육 사정을 알아보고는 부임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베트남 출신 호아 홍 누엔 교수도 이런 고민을 갖고 있다. 그는 두 살 난 딸을 한국 유치원에 맡긴다. 선생님과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아이가 유치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국립대 교수 월급으론 외국인 유치원은 꿈도 못 꾼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는 “지금 상황이 이어진다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한국이 외국인 엘리트를 유치하고 싶다면 외국인들이 다닐 수 있는 저렴한 교육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어 인프라 한국 자산관리회사에서 근무했던 한 40대 미국인은 3개월 전 한국을 떠났다. “여기선 언어 장벽 때문에 빨리 성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한국계 미국인 김모씨는 자신도 언어 장벽을 절실히 느낀다고 했다. 업무차 거래 회사의 한국인 직원을 만나도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친해지는 것은 고사하고, 업무상 오가는 대화가 정확히 전달되기도 쉽지 않다”며 “같은 일에 시간이 오래 걸리니 실적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대학과 기업들이 국제화를 외치며 외국인 교수·기업인을 공격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능력을 제대로 펼치기엔 영어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업무에 필요한 자료가 영어로 돼 있지 않고, 회의도 대부분 한국어로만 진행돼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기업도 마찬가지였다. S그룹에서 올 초까지 글로벌 인재 관리 업무를 맡았던 미국인 M모 임원은 “팀원들이 어떤 서류를 번역해주느냐에 따라 내 일이 결정됐다”며 “내 업무평가 결과를 영어로 전달받은 적도,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일상 생활의 불편함도 한국 근무를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영어 학원에서 근무하는 30대 미국인 강사는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쓰레기는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인터넷은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인들의 영어 수준이 전반적으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병원을 가거나 쇼핑을 하러 가면 불편을 많이 느낀다”며 “일부 가게는 ‘노 잉글리시’라며 나가라고 손짓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비자 최근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 취직한 미국인 크리스틴(28·가명). 그는 원래 이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두 군데 회사에 더 취직이 됐었다. 하지만 두 회사 모두 채용 통보를 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안하지만 다른 데를 알아보라”고 연락해 왔다. 비자 때문이었다. 그의 비자는 외국인 전문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특별활동자격사증(E-7). 하지만 발급이 까다로워 외국인 전문인력의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이 비자를 발급 받으려면 신청서·자격증·고용계약서 등 기본 서류 외에 취업할 업체를 관할하는 주무부처 장관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 이 추천서를 받기까지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석 달까지 기다린다.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추천서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 증권사 인사 담당 직원은 “신청한 지 한참이 지나도 비자가 나오지 않아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인도 취업이 잘 안 되는데 굳이 외국인을 써야 하느냐’는 답변이 왔다”고 말했다.

추천서가 나오면 출입국사무소로 직원이 방문해 비자 발급을 신청한다. 3~5주 뒤 접수 번호가 나오면 외국인 근로자가 대한민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발급받고, 이후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외국인등록증을 받아 회사에 사본을 제출하면 비로소 입사 준비 절차가 마무리된다. 이 과정을 대부분 구직자가 아닌 채용 기업이 도맡아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안 뽑고 만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나마 E-7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직종은 제한적이다. 대부분이 제조업이고 서비스업 쪽은 금융업 정도다. 지난해 정부 내에서 서비스업 강화를 위해 대상 직종을 확 풀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법무부의 반대로 정보기술(IT) 컨설팅업을 추가 허용하는 데 그쳤다. 한국 기업에서 실무자급 관리직으로 일하고 싶은 외국인에겐 비자 따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것이다. 법무부 체류관리과 고석곤 책임관은 “비자 발급 서류가 대부분 회사가 마련해야 하는 것이어서 구직자인 외국인 입장에서는 절차가 더 길고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라며 “하지만 국내에서 꼭 필요한 전문인력만 받자는 것이 비자 정책의 원칙인 만큼 절차 관리를 엄격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안혜리·최현철·문병주·임미진·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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