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명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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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호 29면

폴란드는 강대국에 늘 당했다는 이미지가 있다. 18세기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의해 세 토막이 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소련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다. 하지만 폴란드는 20세기 들어 주변국을 침공한 적이 있다. 독립한 지 석 달이 안 된 1919년 2월에 볼셰비키와 반혁명 세력 간의 내전이 한창이던 소련을 침공했다. 중세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를 재정복하기 위해서였다. 21년 3월까지 벌어진 폴란드-소련 전쟁이다. 서방의 반혁명 지원에다 폴란드까지 끼어들자 레닌·트로츠키·스탈린 등 볼셰비키 지도부는 당혹감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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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유럽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볼셰비키를 돕겠다며 붉은 군대에 지원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집안 출신인 가죽 기술자 사무엘 밀리밴드(1895~1966)도 그랬다. 조상 대대로 살던 폴란드 대신 이념을 택했다. 종전 뒤 브뤼셀에서 가정을 꾸린 그는 40년 2차대전이 터지자 외아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탈출했다. 벨기에에 남은 부인과 딸은 50년에야 다시 만났다.

아들 아돌프는 영국 도착 뒤 히틀러와 같은 발음의 이름을 영국식인 랠프로 고쳤다. 랠프 밀리밴드(1924~94)는 기술학교에 다니다 41년 런던정경대에 입학했으나 영국 해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뒤 복학한 그는 47년 대학을 우등 졸업하고 이듬해 영국 국적을 얻었다. 군 복무와 교육이 힘이 됐다. 그는 영국과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아버지의 ‘붉은 DNA’가 발현한 셈이다. 아버지가 총 들고 마르크스주의를 지켰다면 아들은 학문과 글로써 싸웠다.

랠프가 64년 창간한 이론지 ‘소시얼리스트 레지스터’는 좌파의 관심사를 보여주고 활동방향을 제시하는 이론 지침서로 통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꾸준히 발행되고 있다. 올해는 자본주의와 의료제도가 주제다. 그에 앞서 폭력·글로벌리즘·환경문제도 이슈화했다. 랠프는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무덤 근처에 묻혀 있다. 골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다운 선택이었다.

랠프의 두 아들이 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 외교장관을 맡았던 데이비드와 에너지·기후변화 장관을 지낸 에드다. 이제는 야당이 된 노동당의 당수 경쟁은 이 형제의 독무대였다. 9월 25일 동생인 에드가 지도자로 뽑혔다.

두 형제는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지 않고도 옥스퍼드대에 진학했다. 성적과 관계없이 누구나 입학해 실업교육을 받거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지역 공립학교 출신이다. 힘든 여건 속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형제는 지역교육위원회 추천으로 옥스퍼드대에 들어갔다. 교육·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노동당의 목소리와 일치하는 이력이다. 두 형제가 노동당에서 인기를 얻는 요인의 하나다. 이들은 하원의원과 장관을 맡으며 실력도 보여줬다. 좌파든 우파든 원칙을 지키고 실력을 갖춘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나라가 힘 있는 나라다. 밀리밴드 집안은 이를 갖췄기에 3대 좌파 명문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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