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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미·중·일 환율 싸움 … 한국은 ‘새우등’ 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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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판이다. 그런데 이 새우,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미국·중국·일본의 환율 전쟁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한국의 처지다.

30일 코스피지수는 1872.81로 장을 마쳐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은 1140.20원에 거래를 마쳤다. 사진은 서울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의 모습. [연합뉴스]

미·중·일의 환율 전쟁은 이제 선전포고 단계를 넘었다. 언제 불을 뿜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세 나라의 생각은 똑같다. 자국 통화가치를 낮춰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통화가치가 떨어지면 자기 나라 수출 상품의 가격이 싸진다. 이렇게 되면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고용도 늘고, 경기도 좋아진다. 문제는 서로 자국 통화가치를 끌어내리겠다고 하니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미국 경기는 요즘 위태위태하다. 실업률이 급증하고, 주택 가격도 여전히 추락하면서 경기회복 속도가 확연히 둔화했다. 그래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꺼져가는 경기의 불씨를 살리려고 시중에 돈을 더 풀고(양적 완화) 있다. 달러 약세 공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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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중국·일본·한국의 통화가치는 폭은 다르지만 상승세를 타고 있다. 30일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값은 전날보다 2.0원 오른 1140.0원에 장을 마쳤다.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절상률이 2.6%다. 이 기간 중 일본 엔화는 10.5%, 중국 위안화는 2.0% 절상됐다. 하지만 한·중·일의 대응방식은 다르다. 중국은 위안화 가치가 더 오르지 않게 사실상 묶어둔 채 버티고 있다. 일본은 지난달 15일, 6년6개월 만에 처음으로 외환당국이 시장에 개입해 엔화 강세를 일시나마 돌려놓기도 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대놓고 시장에 개입하기가 힘들다. 다음 달 서울에서 열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의장국인 한국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면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부터 매년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올해도 8월까지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195억6000만 달러에 달했다. 통화당국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원화가 저평가돼 있다는 인식이 퍼진 상황에서 G20 의장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43.3%나 된다. G20 회원국 중 수출 비중이 가장 높다. 그래서 원화 강세가 경기 상승세에 주는 마이너스 효과가 일본이나 중국보다 더 크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원화가치가 달러당 1050원까지 오르면 국내 91개 주력 수출기업의 영업이익은 5조9000억원 줄 것으로 분석했다.

경제대국들의 자국 통화 절하 경쟁은 우리의 통화정책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물가 오름세가 심상치 않아 기준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금통위는 이미 지난 7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고, 지금은 추가 인상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돈을 풀자 그 일부가 국내 채권시장으로 몰려와 시중금리를 끌어내리고(채권값 상승) 있다. 지난달만 해도 외국인이 국내 채권시장에서 순매수한 규모는 3조4430억원(29일까지 기준)이나 된다. 이에 따라 국고채(3년물)의 금리는 30일 연 3.32%까지 떨어져 2004년 이후 최저치 (연 3.2%)에 근접했다.

다만 원화가치의 상승세는 표면적으로 주식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다. 외국인의 투자를 더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장세가 빨라 주가가 꾸준히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데다, 설령 주가가 오르지 않더라도 원화가치 상승에 따른 환차익을 볼 수 있어 외국인의 한국 투자는 확대될 전망이다. 이미 외국인은 올 들어 지난달 29일까지 코스피 시장에서만 4조1000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하지만 원화가치 절상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증시의 변동성이 커지고, 불확실성을 높일 수 있다. 토러스 투자증권 김승현 리서치센터장은 “단순히 환차익만 노리고 국내 증시에 진입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많아진다면 변동성이 커지면서 시장이 출렁거릴 수 있다”고 말했다. 대신증권 박중섭 연구위원은 “원화가치가 단기간에 달러당 1050원까지 오르면 수출업체들의 실적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 외국인 투자자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종윤·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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