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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2) 이현상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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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는 백 야전전투사령부에 보고된 숫자다. 대개 전투의 성과는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사살한 적을 일일이 검증할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숨진 사람의 숫자를 세는 데는 과장이 끼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체 작전이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숨어 있던 빨치산 부대는 이로 인해 원래의 전투력을 모두 상실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내가 100여 일 동안 이끌었던 전투사령부의 작전은 1952년 2월 8일 아침 6시를 기해 끝이 났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나는 이 작전을 마감한 뒤 창설되는 2군단을 맡아 임지를 춘천으로 옮겼다. 나머지 빨치산을 처리하는 임무는 수도사단장 송요찬 장군에게 맡겨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3월 광주의 빨치산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모습. 이 대통령은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을 생포하는 사람에게 포상을 한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하며 토벌대를 격려했다. 빨치산 포로수용소는 ‘백 야전전투 사령부’가 토벌작전 초기에 설치한 것이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린 사진이다.

수도사단 역시 3월 14일 작전권을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인계한 뒤 전방으로 이동하면서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모든 작전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전체 작전 기간을 통해 우리가 거둬들인 성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사살 7000여 명, 생포 6000여 명의 성과였다. 이 전과를 두고 기록마다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최소 1만 명 정도의 빨치산이 전투사령부의 작전에 걸려들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혔다.

육군본부는 애초 빨치산의 숫자를 3000명 정도로 파악했다. 비무장 대원까지 포함해도 8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봤던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전투사령부의 보고는 기대치를 훨씬 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작전으로 빨치산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사단이 철수한 뒤에도 빨치산 일부는 명맥을 겨우 유지하면서 활동을 벌였다. 가끔 산간 가옥이나 그 밑의 마을에 내려와 보급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빨치산의 활동은 치안을 위협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경부선을 위협하고, 전라선을 끊으면서 군사물자의 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등 사회의 근간마저 뒤흔드는, 국가안보 수준의 위험은 아니었던 것이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작전 성공으로 그런 국가안보 위협은 사라졌다고 해도 잔당(殘黨)의 준동은 멈추지 않았다. 훨씬 뒤의 이야기지만, 최후의 빨치산은 63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그 전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꿈틀대던 빨치산들은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떠난 뒤 작전을 펼쳤던 서남지구전투사령부와 경찰이 토벌했다.

북한 애국열사릉의 이현상 가묘.

지리산과 빨치산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현상이다. 평양의 ‘열사(烈士)’ 묘역에는 그의 가묘(假墓)가 만들어져 있다. ‘남조선 혁명가, 1905년 9월 27일생, 53년 9월 17일 전사’라는 묘비도 세워져 있다. 그는 남한에서 활동했던 모든 빨치산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가 사살된 채 발견된 때는 53년 9월 18일이다. 이현상의 시체는 40대 후반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줄이 선 미제 군복 바지와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이었다. 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 그리고 염주가 들어 있었다.

군 토벌대에 사살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 피살 경과는 불확실하다. 당시 경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던 차일혁 총경의 수기는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차 총경은 9월 18일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발견한 이현상(추정) 시체를 두고 “정확하게 뒤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다”고 묘사했다. 차 총경의 회고에 따르면 이현상은 토벌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에 따른 여파로 평당원으로 강등된 다음 같은 빨치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현상이 사망할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그를 쫓는 토벌대의 활동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사망은 치안과 사회 근간을 어지럽히던 빨치산의 활동이 대부분 종결됐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비록 그가 국군의 총격에 맞아 숨졌는지, 아니면 빨치산에 의해 사살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그의 죽음으로 남한 내 빨치산의 활동은 커다란 단락을 맺은 셈이었다.

이현상의 제 5지구당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지만 전남과 전북·경남 도당 등은 관할 지역을 몇 개의 작은 지구로 나눠 10명 정도의 작은 부대를 운영했다. 그러면서 재건을 꿈꾸었겠지만 대세(大勢)는 이미 넘어간 뒤였다. 그의 죽음 뒤 경남 도당을 지휘했던 이영회의 부대도 후속 토벌대에 의해 전멸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53년 겨울을 맞아 전방으로부터 1개 정규 사단을 추가로 투입해 빨치산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새로 투입된 사단은 박병권 소장이 이끄는 5사단으로, 53년 12월 1일 남원에서 정식으로 전투사령부를 발족했다. 그때까지 지리산 지구 일대에서 세력을 유지했던 빨치산은 줄잡아 800명 선. 박병권 장군의 전투사령부는 54년 2월까지 1단계 작전을 펼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빨치산과 주요 간부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현상에게 자주 반기를 들었다가 제 5지구당 해체 뒤 실질적으로 서남지구 빨치산들을 총지휘했던 전북 도당 위원장 방준표 또한 54년 1월 31일 남덕유산의 아지트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빨치산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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