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3) 저우서우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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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정착한 저우서우천은 여러 개의 금융기관을 운영하며 홍콩대학 설립에도 참여했다. 저우에게 잘 보이는 바람에 재임기간을 연장 받은 홍콩 총독도 있었다. 1930년 남중국 보이스카우트 대회에 명예총재 자격으로 참석한 저우(앞줄 오른쪽 둘째). 김명호 제공

1883년 2월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나라는 조선에 세관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리훙장은 묄렌도르프를 파견하며 저우서우천을 조수로 딸려 보내려 했다.

저우는 조선행이 내키지 않았다. 묄렌도르프는 톈진(天津)의 외국인 사회에서 소문난 저질이었다. 고향에 가면 뭔가 여지가 있을 것 같아 휴가를 청했다. 부친은 도움이 안 됐다. “나라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키운 보람이 있다”며 즐거워했다.

톈진으로 돌아와 보니 묄렌도르프는 유학 동기생 탕사오이(唐紹儀)와 양루하오(楊如浩)를 데리고 조선으로 떠난 후였다. 저우의 자리에도 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실직자가 됐지만 홀가분했다. 외국인 회사를 알아보기 위해 상하이로 내려갔다. 톈진 세관이 “학업을 마친 후 임의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관비 유학생 규정에 의거해 체포령을 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1874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의 탕사오이(오른쪽)와 양루하오.

조선에서 공문을 접한 탕사오이와 양루하오는 저우를 구하기 위해 두 달치 봉급을 들고 묄렌도르프를 찾아갔다. 공짜라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 다루기가 편했다. 묄렌도르프는 리훙장에게 서신을 보내 저우서우천의 조선 파견을 요청했다.

저우는 부산세관 통역관으로 조선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은 본국에서 냉대 받던 중국 청년들에게 입신(立身)과 양명(揚名)의 땅이었다. 위안스카이도 그랬고 탕사오이도 그랬다.

갑신년(1884) 겨울, 조선 귀족 집안 자식들 사이에 칼부림이 벌어졌다. 정변 첫날 밤 옛 동료들에게 칼탕을 당한 민영익은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실려갔다. 사태를 평정한 위안스카이는 민영익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묄렌도르프의 집을 찾았다. 보초를 서고 있던 용산세관 통역관 탕사오이가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위안을 제지했다. 호통을 쳐도 막무가내였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던 위안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27년 후 중국 역사상 최초의 총통과 국무총리가 될 두 사람은 조선땅에서 이렇게 처음 만났다.

위안은 그냥 발길을 돌렸다. 주둔지로 돌아오며 싱글벙글했다. 민영익의 안위 여부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준수한 용모에 당당한 행동거지,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저런 애에게 보초를 서라고 한 묄렌도르프는 정말 형편없는 놈이다. 나라면 꼭꼭 숨겨 놓겠다.”

조선인들의 사각지대에서 중국인들 사이에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는 위안스카이와 관비 유학생 출신들을 연결시키는 계기가 됐다. 위안은 외교와 통상에 관한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이들을 불렀다. 외국어를 중국말처럼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알았다. 리훙장에게 보고서를 보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 높은 직위를 주자고 간청했다. 저우서우천 23세, 탕사오이와 양루하오는 22세, 위안스카이는 25세였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20대 중초반에 두세 살은 작은 차이가 아니었다.

저우서우천은 찻집에서 일하던 조선 여인과 초량 일대를 자주 산책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홍콩의 동생들에게 근황을 전했다. “내키지 않는 일일수록 기를 쓰고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과 필연을 따지지 마라. 두 개가 뒤엉킨 것이 인생이다. 나는 이제야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과 여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라.”

저우는 35세 때인 1896년 조선을 떠났다. 마지막 보직은 인천 주재 영사였다. 귀국 후에는 철도·금융·교육·외교·항만건설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12년 위안스카이가 집권하자 “오래 살고 싶다”며 은퇴했다.

홍콩에 살며 10년에 한 명씩 새로운 부인을 맞이했다. 1959년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치는 여자들에게 맡기고 남자들은 전쟁과 돈벌이에만 몰두하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1872년 청(淸) 제국이 파견하기 시작한 관비 유학생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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