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입학사정관 전형 ‘괴짜’ 합격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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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제작, 뇌 체조 조교, 큐브 퍼즐 지역장, 청소년 기자 . 나노로봇 과학자나 생명공학도가 되겠다며 올해 KAIST에 지원한 ‘괴짜’ 합격생들의 이력이다. 겉으론 과학적 재능과 무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창의력은 엉뚱한 행동에서 나온다’며 KAIST가 과학영재 출신에 치중했던 문호를 지난해부터 일반계고와 전문계고로 확대한 결과다.

연출·작가·촬영감독으로 1인 3역

카이스트에서 유전공학을 공부하려는 조희은(경기 김포시 양곡고 3)양은 친구들 사이에서 영화 제작자로 불렸다. 중학교 신입생시절 우연히 방송반에 들어간 것이 계기였다. 당시 학교가 방송반에 새로 들인 시설·장비가 조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선배들을 도와 20~30초짜리 간단한 광고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 뮤직비디오 제작까지 발을 넓혔다. “영상을 찍고 음악을 입히는 작업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방송기술도 찾아 배우며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어 보는 경험을 하게 됐죠.”

조양은 영화에도 뛰어들었다. 3년 동안 작품 3개를 연거푸 만들었다. 공포영화, 가족애를 담은 영화,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청소년들의 학업 고민을 담은 청소년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연출자로, 때론 작가로, 촬영감독으로 1인 3역을 하며 친구들과 협동했다. 이를 들고 청소년영화제와 방송국경연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대회 부상으로 중국 연수도 다녀왔다.

김포시 작은 시골 마을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조양이었지만, 열정만큼은 대도시 학교에 다니는 어느 학생 못지 않았다. 그는 정부가 운영하는 청소년 리포터로 선발돼 김포시 양곡면 일대의 항일 유적지를 소개하며 마을을 알렸다. 친구들을 설득해 토론동아리도 만들었다. 시골 학교라 다른 학생들의 관심이 적었던 탓에 토론동아리를 만들고 토론대회까지 참여한 학생은 조양이 처음이었다.

카이스트 입학사정관은 면접에서 “인문학이 적성인데 이공계로 지원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조양은 “내겐 적성보다 더 중요한 신념이 있다”며 “DNA를 연구해 유전병을 치료하는 것이 목표”라고 답했다. 그는 “이런 활동이 과학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눈이 될 것”이라며 사정관을 설득했다. 또 “영화 소재를 찾으려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 유전자 분석을 소개한 책을 보고 관심을 쏟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유전자 관련 기사와 자료들을 찾아 읽고 수집·정리해 만든 자료집도 보여줬다.

카이스트 윤달수 학생선발팀장은 “어려운 교육 여건 속에서도 스스로 활동을 찾아 실천하는 태도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혈관질환 치료 나노로봇 개발 꿈 꿔

나노로봇 과학자가 꿈인 최명근(충북 증평 형석고 3)군은 두뇌 훈련과 관련한 활동에 집중했다. 그 중 하나가 큐브 맞추기다. 큐브는 정육면체뿐만 아니라 다면체 등 종류가 다양하고,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즐기며 지능을 훈련할 수 있는 퍼즐이다. 최군은 “며칠 동안 쩔쩔매다 큐브의 면을 다 맞춘 순간 느낀 희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친 기쁨과 비교했다.

실력이 늘자 큐브 맞추기 기록 단축에 도전했다. 큐브가 손에 익으면서 1분 30초 걸리던 것을 두 달여 만에 30초로 단축시켰다. 인터넷에서 큐브 자료를 찾아 읽고 네티즌들과 교류하며 실력을 키웠다. 큐브협회 회원으로도 가입해 활동했다.

거주지인 충북 증평에서 청주까지 나가 동호회 지역 정기모임에도 꾸준히 참여해 지역회장에까지 올랐다. “큐브 맞추기로 공간지각력을 기르고, 수학에서 도형과 전개도 문제를 풀 때 입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동호회 활동으로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됐고, 동호회 회장으로 리더십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학교에선 두뇌체조 학생조교로 활약했다. 두뇌체조는 학생들에게 집중력과 심리적 안정감을 길러주려고 학교에서 도입한 신체훈련 프로그램이다. 관심 있는 학생들이 강사에게 먼저 교육을 받아 익힌 뒤, 두뇌체조 수업 때 앞에서 친구나 후배들을 이끈다. “학생조교는 따로 시간을 내 강사에게 자세히 배울 수 있어 두뇌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컸어요.”

그는 대학에서 나노로봇을 연구할 계획이다. 심근경색, 뇌출혈 등 혈관질환 치료가 목표다. “큐브와 두뇌체조로 다진 입체적 공간 지각력이 복잡한 혈관을 탐색하는 나노로봇 개발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전공을 약학에서 공학으로 바꾼 이유이기도 하다.

발명·수학·생물 동아리 동시다발 활동

양광열(충남 조치원고 3)군의 품엔 항상 한권의 책이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간직해 온 에디슨 전기다.

그는 “다른 책은 다 버려도 이 책만은 낡고 해지더라도 간직할 것”이라며 애착을 나타냈다. 그에게 “과학자의 꿈을 심어주고 지탱해오게 한 동기가 된 책”이라며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고 회상했다. 거위 알을 품고 부화를 시도했던 에디슨을 닮고 싶어 열심히 호기심을 키웠다. 주변 현상에 관심을 갖고 모르는 건 알 때까지 계속 묻고 찾았다. 머리에 떠올라 만들고 싶은 것들은 폐품을 모아 만들어보고 실험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밑천 삼아 고교에서 3개 동아리에 가입해 동시에 활동했다. 발명, 수학, 그리고 생물실험 동아리다. 발명 동아리에선 ‘변기 뚫는 도구’를 개선한 작품으로 도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수학 동아리에선선배의 가르침을 받아 실력을 다지고 친구들과 경시대회를 준비했다. 생물실험 동아리에선 생물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들을 실험하고 체험했다. 3개 동아리에서 모두 회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다.

“생물실험 동아리를 하면서 초·중학생 때 과학영재반에서 경험한 오징어 해부실험 경험이 떠올랐고, 이것이 진로를 결정하는 길잡이가 됐죠. 정밀하게 분석해야 하는 수학풀이 능력과 뒤집어 새롭게 생각해야 하는 발명 경험이 생동감 넘치는 생명공학 연구의 바탕이 될 겁니다.”

[사진설명]과학분야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다양한 재능과 경험을 가진 일반계고와 전문계고 학생들의 KAIST 입학이 이어지고 있다. 조희은양은 “독립영화를 만들던 상상력으로 불치병을 치료하는 유전자 연구에 헌신하고 싶다”며 입학식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박정식 기자 tangopark@joongang.co.kr / 사진=최명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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