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산책] 2방 성공 복싱 세계챔프 지인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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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일의 복싱 세계챔피언 지인진(32). 인기가 끊어진 국내 권투판에 모처럼 출현해 화끈한 파이팅을 보여주고 있는 그다. 복서로서는 황혼의 나이. 그럼에도 지난달 30일 세계복싱평의회(WBC) 페더급 타이틀 2차 방어에 성공해 일단 롱런 채비를 갖췄다. '한국 최초의 통합 챔피언'이라는 꿈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배고프다. 이젠 지망생조차 찾기가 쉽지 않은 한국 프로복싱을 혼자 대표해 나가는 일이 외로워 보이기도 하다. "복싱이 미치도록 좋아서 지금까지 왔는데 하면 할수록 허탈하네요." 설 연휴 직전인 지난 4일 그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4월 마이클 브로디(영국)를 꺾고 챔피언이 됐다. 천신만고 끝이었다. 2001년 7월 첫 세계 도전에서 에릭 모랄레스(멕시코)에게 판정패로 질 때 마지막인 줄 알았다. 그런데 2003년 10월 다시 기회가 왔다. 적지(영국 맨체스터)로 날아가 브로디를 판정으로 눌렀다. 라커룸에서 감정이 벅차 있던 그는 그러나 곧 피눈물을 흘렸다. 채점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판정이 번복되고 재시합이 선언된 것. 두번째 맨체스터행 비행기에 오르며 그는 결심했다. "군말없이 때려눕혀 버리자." 그리고 브로디를 7회에 눕혔다. 어퍼컷이 상대 콧등에 꽂히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때 브로디는 콧뼈가 무너져내렸다.

▶ 난 향기 짙은 한 카페에서 지인진이 찻잔을 들고 웃었다. 링에서는 맹수처럼 사납지만 링 밖에선 쑥스러움을 잘 타는 그다. 임현동 기자

# 싸움꾼이던 어린 시절

초등학생 때부터 그는 동네(서울 봉천동)에서 알아주던 싸움꾼이었다. 별명이 '곤조(근성의 일본말)통'이었다. 하도 잘 싸워 그가 낀 싸움은 구경거리였다. 동네어른들이 초코파이를 미끼로 싸움을 부추기기도 했다. 초코파이 두 개에 혹해 2대 1로도 싸웠다. 그가 진학한 당곡중에 복싱부가 있었다. 주먹 하나 자신있었던 그는 복싱부를 찾아갔다. "그때 잘 나가던 세계챔프이자 제 우상인 유명우 선배처럼 되겠다고 맘먹었지요." 당곡고까지 6년간 소년체전(중3)과 전국체전(고2)에서 입상도 했다. 고교 졸업 무렵 고민에 빠졌다. 인기가 시들해진 프로로 갈 것인가, 대학에 진학해 체육교사가 될 것인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는 프로를 택했다.

# 링과 공사판

그해 겨울 신인왕전에 나갔다. 데뷔전이던 1회전에서 탈락했다. 대입 준비로 몸도 못 만든 채 나갔다가 두번 다운당한 끝에 판정패. 프로통산 2패 중 1패가 그것이다.

1991년 프로에 데뷔한 지인진은 3년 뒤 한국챔피언이 된다. "근사한 생활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90년대 초 아버지(2002년 작고)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어머니(60)가 청소일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입 하나 덜겠다"며 입대했다. 복무 중인 이듬해 체육관과 부대의 협조로 휴가를 받아 밴텀급 동양챔피언이 됐다.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제대하고 체급을 페더급으로 올리면서 타이틀을 반납한 그는 벌이를 위해 공사판을 찾았다. "운동을 위해 일요일 하루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6일을 지내는 생활이었죠." 그렇게 시작한 '6일 복싱-1일 노동 생활'은 모랄레스에게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 5년간 계속됐다.

# 통합 챔프 꿈

지난해 브로디를 꺾고 세계챔프가 된 뒤 생전 처음 어머니께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사양했다. "맞아 번 돈인데. 너나 아껴써라."

지인진의 평소 체중은 67kg이다. 페더급(57.15kg 이하)에 맞추려고 그는 경기 전 3주간 하루 한끼만 먹고, 운동은 두 배로 한다. 그동안 참 많이도 맞고 부서지고 찢기고 꿰맸다. 그런 고생의 대가 치고는 번 게 없다. 브로디와의 두번째 경기에서 받은 5000만원이 지금까지 손에 쥔 가장 큰 돈이다. 이번 2차 방어전에선 대전료 7000만원 중 매니저 몫 등을 빼고 절반이 좀 넘게 받았다. 예전 챔피언들은 대전료도, 후원금도 많았다. 요즘은 후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최초의 통합 챔피언 꿈은 그래서 그의 꿈이다. 현재 세계복싱협회(WBA).국제복싱연맹(IBF) 챔피언은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멕시코), 세계복싱기구(WBO) 챔피언은 스콧 해리슨(영국)이다. 이들과 통합전이 성사되면 '대박'과 '명예'가 기다린다.

2002년 12월 결혼한 뒤 그는 분가했다. 어머니가 사는 곳에서 5분거리인 봉천동 14평짜리 연립주택이다. 풍족하진 못하지만 그나 아내나 모두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 탓에 오붓하다. 어릴적 '봉천동 록키'가 세계챔피언이 돼 아직도 그 동네를 지키는 거다. 그는 두살짜리 아들에겐 절대 복싱을 시키지 않겠다고 한다. "뭘해도 좋지만 복싱만은 말릴거예요. 너무도 험한 길인데, 그 대가가…."

글=장혜수 기자<hschang@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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