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으로 일궈낸 성공 스토리 … 최근 5년 동안 2000억 달러 수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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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하루에 한 건 이상 수주

현대건설 김중겸 사장, 대우건설 서종욱 사장, GS건설 허명수 사장 등 주요 건설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은 연초에는 반드시 해외에서 전략회의를 시작한다. 그만큼 해외 건설 시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국내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면서 주요 CEO들이 해외에 쏟는 관심은 더 커졌다.

서종욱 사장은 연초 “해외 사업 비중을 30% 이상으로 늘려 새로운 성장축으로 삼겠다”고 설명했다. 김중겸 사장도 “해외에서 먹을거리를 찾아야 한다”며 최근 1년간 35개국을 돌았다. CEO들은 현지에서 직접 수주 전략회의를 주재한다. 이 같은 해외 현장경영은 실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해외건설업체들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규모가 큰 해외공사를 잇따라 따내고 있다. 1980년대 동아건설이 36억 달러에 수주한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UAE 원전 수주 이전까지만 해도 단일 공사로수주 금액이 가장 컸다. [중앙포토]

올 들어 19일까지 우리 업체들이 따낸 해외 공사 수주액은 517억 달러가 넘는다. 2009년 한 해 동안의 수주액(491억 달러)을 넘어선 것으로, 연간 기준 사상 최고치다.

지난해는 217개 업체가 해외의 일감을 땄지만 올해는 벌써 221개 업체가 한 건 이상 수주했다. 이런 추세라면 국내 업체들의 올 해외 건설 수주액은 당초 목표(600억 달러)를 넘어 7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우리나라 총수출액(3635억 달러)의 20%다.

특히 최근의 상승세가 무섭다. 65년 첫 해외 건설 수주 이후 누계액이 2000억 달러를 돌파하는 데 40년5개월이 걸렸지만 3000억 달러와 4000억 달러를 넘는 데는 각각 2년11개월, 1년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해외 건설 초창기인 70년대 국내 업체들이 해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싼 인건비를 바탕으로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정도였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는 부가가치가 높은 석유·화학 플랜트 수주가 크게 늘고 있다. 이는 가격 경쟁력과 기술력,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 등이 가미돼 이뤄 낸 성과라고 건설업계는 풀이한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국내 업체들은 특히 안전사고 예방, 공기 단축 등 뛰어난 현장 관리 능력이 돋보인다”며 “이를 통해 해외 시장에서 꾸준히 신뢰감을 쌓아 온 것도 최고 실적을 낸 요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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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추격이 걱정

지난 1월 카자흐스탄에서 10억 달러 규모의 가스화학단지 건설 공사가 발주됐다. 국내 H사와 S사, 중국의 S가 입찰 경쟁을 벌인 결과 중국 업체가 공사를 땄다. 입찰에 참여한 건설사 임원은 “중국 기업이 우리보다 공사 단가를 25%나 낮게 써 냈다”고 전했다.


사상 최고의 해외 건설 실적에도 불구하고 요즘 CEO들이 갖는 가장 큰 고민은 중국·인도 등 후발국의 추격이다. 김중겸 사장은 “우리는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확인했지만 동시에 미래 불확실성도 확인했다”고 걱정했다.

국내 업체들의 기술력이 일정 수준에 오르기는 했지만 세계 유수의 업체들에 비해서는 아직 모자라는 편이다. 이 때문에 플랜트 기본설계(FEED) 등 고부가가치 분야 수주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플랜트 FEED의 경우 올 3월 SK건설이 에콰도르에서 수주한 한 건이 해외 건설 역사상 처음이다.

반면 국내 업체들의 주무기였던 가격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중국·인도 업체들이 싼 인건비를 바탕으로 일감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중국 업체들과의 입찰에서 져 일감을 빼앗긴 프로젝트가 10건이 넘는다. 해외건설협회 정책연구실 손태홍 팀장은 “중국 업체들이 제시하는 공사비가 국내 업체보다 평균 30% 싼 데다 시공 경험까지 쌓고 있다”며 “플랜트는 아직 단순 시공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머잖아 부가가치가 높은 영역까지 침범할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토목 시장은 진작에 내줬다. 익명을 요청한 중견업체 임원은 “중국 업체가 입찰하면 한국 업체는 아예 입찰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국내 업체가 절대우위를 보여 왔던 중동에서조차 턱밑까지 쫓아왔다. 어쩌면 올해는 역전될 수도 있다.

손 팀장은 그러나 “아직 중국 업체의 기술력이나 해외 신인도가 한국 업체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라고 말했다. 대림산업은 200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플랜트 공사를 놓고 중국 업체와 맞붙어 쓴맛을 봤다. 그러나 중국 업체가 제시한 공사 단가가 대림산업보다 30% 이상 쌌지만 중국 기술력에 의문을 품은 발주처가 본 계약을 포기하고 대림산업에 공사를 맡겼다. 대림산업 배선용 상무는 “가격 경쟁력은 없어도 국내 업체들의 기술력과 신뢰도가 아직은 중국보다 앞서는 것을 보여 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스스로 체질 바꿔 경쟁력 키워야”

후발국의 거센 도전을 뿌리치고 더 많은 공사를 따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건설업계는 무엇보다 국내 건설 시장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예컨대 국내 건설 시장은 공공·민간 할 것 없이 대부분 최저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내 업체들의 경쟁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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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건설사의 한 임원은 “건축·토목·플랜트, 공공·민간 등 전 분야에서 최저가 낙찰제가 적용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업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협력회사에 단가를 깎는 일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공사 단가를 내리니 업체들이 기술력 확보를 위한 연구를 게을리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업체들도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아직도 국내 업체끼리 출혈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대우건설 서 사장은 “국내 건설사들이 중국 업체를 견제하고 선진 업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성을 높여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단순 시공이 아니라 설계와 구매·시공관리·금융까지 건설 전 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현대건설 김 사장은 “건설업체의 본업이 시공이라는 생각은 세계적 흐름에 비춰 보면 편협한 시각일 뿐”이라며 “앞으로는 건설업체가 건설 전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복합 디벨로퍼로서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일 기자



☞국내 업체의 해외건설 주력 분야

◆플랜트=전기·담수 시설 및 석유·가스 정제시설 등 공장을 짓는 프로젝트다. 기술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높아 우리 건설업체들이 집중하고 있는 분야다. 2000년대 들어 국내 업체의 해외건설 수주액의 60% 이상을 차지했고, 올 들어서는 80% 정도를 이 분야에서 따냈다.

◆건축·토목=아파트·빌딩을 짓고 고속도로·터널 등을 만드는 분야로, 해외 진출 초창기 국내 업체들의 주력 사업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저층 건축물과 고속도로 등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공사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초고층 건축물, 해저터널 등 기술력이 요구되는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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