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 감독, 정명훈의 긴 호흡을 배워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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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호 14면

감독 하나 바뀐 것뿐인데 축구 보는 재미가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에선 세트피스에 능한 허정무호를 감상했고 이 가을엔 패스가 매서워진 조광래호가 우리 곁에 있다. 목전의 승리보다 세련된 축구의 가치를 알아보는 국민이 점점 늘 것 같다. 축구 감독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존재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에 따라 음색과 음악에 대한 해석 등이 확 달라진다. 축구팀의 경기 스타일도 감독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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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가 바뀌면서 악단 수준이 월등해지는 경우를 서울시향의 사례에서 본다. 서울시향은 정명훈이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불과 5년 만에 아시아 일류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지난 8월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말러 교향곡 2번을 공연했고 2000여 관객들이 모였다. 유럽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매끈한 앙상블에 관객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축구 감독과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역할은 매우 흡사하다. 지휘자가 없어도 악장의 리드만으로 단원들은 악보의 지시를 옮길 수 있지만 그것은 스코어 리딩이지 음악은 아니다. 악보에 숨겨진 의미를 짚어내고 단원의 에너지를 한데 모으는 역할을 정명훈이 하고 있다. 축구대표팀의 조광래 감독은 한번쯤 정명훈의 긴 호흡을 참고할 만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리는 축구가 진정 감독의 예술임을 확인하고 싶다.

정명훈

사실 순서로 본다면 국내 음악계가 한국 축구를 벤치마크할 차례다. 특히 국내 오케스트라는 무수한 시행 착오와 도전 정신으로 월드컵 원정 16강에 오른 대표팀의 발전 방식을 배워야 한다. 세계적 강호와 만나도 체력에서 밀리지 않고 대등한 기량을 펼치기까지 한국 축구는 히딩크와 크라머 같은 유능한 외국인 감독을 과감히 초빙했다. 국내 지도자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반발도 있었지만 외국인 감독을 통해 한국축구는 선진 기술과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외국인 지도자들은 한국 선수들이 양 발을 잘 쓰고 훈련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평범해서 그동안 잊었던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한국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세계 수준에 이른 연주가들이 많지만 오케스트라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평범해서 그냥 지나쳤던 우리의 장점을 발견하고 언론의 흔들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인맥과 학맥에서 자유로운 해외 지휘자들의 국내 진출이 활발해져야 한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일찍부터 해외 지휘자들을 음악감독으로 영입해 악단의 선진화를 견인했고 높아진 연주력으로 고장을 대표하는 여러 지역 오케스트라가 탄생했다. 이번 시즌만 해도 사이먼 래틀의 후계자로 꼽히는 다니엘 하딩이 신일본 필하모닉에, 정명훈의 뒤를 이어 댄 애팅거가 도쿄 필하모닉에 새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악단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해외 지휘자들이 국내 오케스트라 수준을 레벨업하는 동안 국내 젊은 지휘학도들이 부지휘자로 기량을 연마하는 제도가 병행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대표팀 사령탑이 히딩크에서 허정무 감독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 정도만 지나면 세계 무대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지역 오케스트라에서 제2의 정명훈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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