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필수이듯 한국사도 필수 아닙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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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총장을 지내며 ‘글로벌 이화’ 프로젝트를 이끈 이배용 교수. 최근 총장을 퇴임한 후 자신의 전공인 한국사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국학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섰다. [강정현 기자]

4년간의 이화여대 총장직을 최근 끝마친 이배용(63·한국사) 교수. 총장 재임시절 그의 모토는 ‘글로벌 이화’였다. 한국사를 전공한 총장이면서 누구보다 국제화에 앞장섰다. 취임할 때 2010년까지 해외 거점 캠퍼스를 20곳 만들겠다고 했는데, 21곳으로 초과 달성했다. 그랬던 그가 퇴임후 ‘한국학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섰다. 글로벌 세계화 시대라고 해서 우리 전통 문화와 역사를 소홀히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총장 재임할 땐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라 거론하기가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그가 가장 큰 문제로 지목한 것은 대학 수능과 각종 고시에서 한국사가 홀대받고 있는 현실. “한국사 교육 이대로는 안된다”며 “국어가 필수이듯 한국사도 필수인 방향으로 조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 최초로 대학교육협의회장을 지냈고, 현재 교육과학강국실천연합회 이사장이기도 하다. 두 단체를 통해 인연 맺은 전국의 전·현직 총장, 교육관계자들과 한국사의 공교육 활성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글로벌 세계화’와 ‘한국사 교육’의 병행 발전을 주창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한국사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사는 한국어와 함께 필수로 해야 한다. 요즘 학생들이 경술국치도 잘 모른다. 과거 없는 미래, 준비 없는 미래가 어디있나. 올바른 가치관의 기본 줄기를 잡는 것은 민족문화와 역사의식이다. 세종의 리더십을 배웠으면 한다. 1418년부터 32년 재위하며 민족문화를 정착시켰다. 국가사상이 유교였던 상황에서 한글을 창제하고, 『향약집성방』을 발간하며 ‘종묘제례악’을 만들었다. 우리의 정서가 담긴 문화를 만들어내려는 문화정치였고 중국의 유교에 대한 균형잡기였다.”

- 한국사 교육이 민족주의를 강조한다는 지적이 있다.

“다문화 사회에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래도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전통의 줄기를 가지고 세계를 포용하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 총장 재임시절 ‘글로벌 이화의 길’을 추진했다. 세계로 우리 학생들이 많이 나가고, 외국 학생들을 많이 오게 했다. 나가는 학생들에게 우리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자긍심을 갖게 했다. 그래야 당당한 한국인으로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숭례문이 불 탈 때 많은 국민이 흘린 눈물의 의미가 뭐였다고 생각하나. 숭례문에 담긴 오랜 전통의 힘과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 한국사 교육의 위기를 일반 대중의 탓으로 돌릴 순 없을 것 같다. 예컨대 올 여름방학에 중앙일보가 기획한 ‘퓰리처 사진전’의 경우 예상을 넘는 호응이 있었다. 20세기 세계사 이야기였다. 또 중앙SUNDAY에 연재중인 이덕일 박사의 한국사 이야기가 인기끄는 것을 봐도 그렇다. TV나 영화의 인기 소재는 대개 역사에서 나온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역사 교육도 좀 더 재미있게 할 순 없을까.

“어려운 숙제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재미 없는 교육을 학생에게 강요할 순 없다. 자기 가족과 동네의 역사에서부터 사회와 국가의 역사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현장 교육이 함께 따라야 한다. 그리고 가슴으로 다가가는 감동과 의미가 전달되어야 한다.”

- 젊은 세대의 역사에 대한 갈증을 제대로 풀어줘야할 것 같다.

“사지선다형 문제의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 역사에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간관계가 다 나온다. 뭐가 잘되고 잘못됐는지, 그 시작과 끝을 모두 다루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 통찰력을 키울수 있다. 젊은이에게 그 점을 설득해야 한다. 현장에서 생생한 의미를 불어 넣어주는 역사해설, 스토리텔링으로 재미있게 풀어주는 역사교육, 역사적 인물을 통해 감동을 주는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스토리텔링 기술은 훈련하면 된다.”

- 본인은 스토리텔링 훈련을 따로 했나.

“다행히 어려서부터 재능이 좀 있었다. 외운 것을 남들에게 잘 이야기해줬다. 할머니가 계셨는데, 내가 할머니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구성력이 향상됐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그런 나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학생들 앞에서 책에서 읽은 역사 얘기를 해보라고 시키면서, ‘너는 꼭 역사 선생님이 되라’는 격려를 하신 게 이화여중·고를 거쳐 이화여대 사학과를 선택하는 밑거름이 됐다.”

- 스토리텔링의 사례를 하나 들어달라.

“내가 사회통합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다른 위원들과 함께 창덕궁에 간 일이 있다. 사회통합의 역사적 현장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창덕궁 후원 맨끝자락에 가면 논과 초가집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모두 처음봤다고 한다. 임금과 세자가 농사의 수고로움을 체험하는 곳이다. 조선의 궁궐에 실제 그런 사회 통합과 배려의 공간이 있었다. 사회통합위원뿐 아니라 각계 지도층, 외국 대사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감동하고 놀란다. 이런 이야기를 좀더 재미있게 구성을 하고 오늘과 연결되는 메시지로 의미를 부여해 전달하는 일이 스토리텔링을 훈련하는 것이다.”

- 한국사를 대중화 노력이 치밀해야 한다는 지적인 것 같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시행하는 ‘역시(歷試·한국사능력검정시험)’를 중앙일보가 후원해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역사의 이해가 모든 일의 기본이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미국·일본 등 해외에서의 ‘역시’도 잘하는 일이다. 기업의 참여가 더 늘었으면 좋겠다. 인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역사교육은 그 자체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경제부국으로 발전하는 데 역사문화가 또 하나의 효자가 될 수 있다. 짧은 역사라면 꿈도 꾸지 못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린 가능하다. 문화관광 콘텐트로 개발해야 한다. 대한민국이란 브랜드의 품격과 신뢰를 높이는 길이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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