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물난리 너무 컸나, 김정은 후계 내부 조율 안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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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후계문제와 관련된 비중 있는 결정이 나올 것이란 측면에서 주목받았던 노동당 대표자회가 불발되면서 평양 내부의 속사정이 관심을 끌고 있다. 노동당의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6월 관영매체를 통해 ‘9월 상순’ 개최를 공시했던 당대표자회에 대해 북한 관영매체가 15일 밤까지 아무런 발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집권 이후 북한의 정치일정이 미뤄진 것은 2005년 3월로 잡혔던 최고인민회의 11기 3차 회의가 한 달 늦춰진 경우가 유일하다. 하지만 당시는 예정일 닷새 전 연기 예고를 했기 때문에 이번과는 상황이 다르다.

석 달 전 44년 만의 당대표자회 일정이 발표될 때만 해도 김정일 후계체제와 관련해 북한이 어떤 논의를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지난 10일을 넘기면서부터는 무산 가능성도 점쳐졌다. 전문가들은 북한에서 ‘상순’이 통상 1~10일을 의미하지만 경우에 따라 1~15일까지를 뜻한다고 말하면서 15일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내놓았다.

대표자회가 불발에 그친 요인으로는 수해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9·9절) 직전 개최를 목표로 지방 대표들이 평양에 모였지만 수해 때문에 교통이 두절되는 등의 문제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는 얘기다.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5일 이달 초 한반도에 불어닥친 태풍 곤파스 소식을 전하며 “폭우와 강한 비바람·산사태로 전국에서 수십 명이 사망하고 8380여 세대의 살림집이 파괴돼 많은 사람이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뒷북 보도를 했다. 지난달 21일 신의주 수해 때 당일 오후 즉각 보도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정부 당국자는 “당대표자회 연기의 불가피성을 주민들에게 알리려 구체적인 인명 피해 상황을 포함한 태풍 소식을 뒤늦게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수해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후계문제 등을 거론할 당대표자회를 열기 쉽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후계체제와 관련한 권력 내부 조율에 문제가 생겼다는 관측도 내놓는다.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과 후견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파악되는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에게 어떤 자리와 권한을 줄지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정일 건강 문제로 인해 연기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관영매체들은 그의 지방 공개활동 소식을 사진과 함께 전하고 있다.

당대표자회가 언제 열리게 될지는 점치기 어렵다. 다만 당 정치국의 결정이란 점에서 조만간 날짜를 다시 잡게 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15일 오후에는 북한 김일성방송대학 홈페이지인 ‘우리민족 강당’이 지난 3일 ‘수령의 후계자 문제 해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글을 올린 것으로 드러나 당대표자회와의 관련성이 주목받았다. 이 글이 “후계자를 올바로 추대하고 유일영도체계를 세워야 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할 수 있다”는 등 후계문제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대북 민간단체인 ‘좋은 벗들’은 “이달 말께 당대표자회 일정을 다시 논의해 10월 10일 당 창건일 이전에 여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대북 소식통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추석 직후인 23일 소집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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