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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6) 임기응변의 책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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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전라북도 순창 동부의 한 작은 마을과 이를 굽어보는 경찰 요새를 촬영한 항공사진. 마을과 주변 농토를 공산 빨치산의 공격으로부터 막기 위해 설치했다. 1952년 11월 사진전문 잡지인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2기 후반기 작전이 펼쳐지던 무렵에 작지 않은 문제가 하나 생기고 말았다. 내부의 문제였다. 참모 사이에 벌어진 작전 관련 사항이었는데, 적을 막바지에 공략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이었다.

당시 빨치산은 크게 쫓기고 있었다. 국군 수도사단과 8사단에 의해 적의 주력은 와해(瓦解) 위기에까지 내몰렸고, 예비 부대와 전투경찰 병력이 겹을 이룬 포위망 때문에 빨치산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의 상황이었다.

야전전투사령부 참모진의 판단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렸다. 이런 빨치산을 어떻게 몰아갈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내용이었다. 2기 작전을 시작할 때 수도사단의 공격로인 운장산과 8사단의 주공이 향했던 회문산 지구의 빨치산들은 결국 8사단의 작전지역인 전주~남원~순천선 서부지역의 야산지대로 분산, 도주한 뒤 그 일대에 숨을 것으로 예상했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소백산맥의 고지대로 통하는 도주로는 서남지구 예비대와 전투경찰 부대가 이미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작전 참모였던 공국진 대령은 운장산과 회문산을 공격한 뒤에는 모든 병력을 서쪽으로 돌려 야산지대에 숨은 빨치산을 마지막으로 소탕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적의 도주 방향이 우리의 예상과 어긋났다. 가장 전투력이 강했던 운장산 지구의 빨치산들은 우선 남동쪽으로 도주로를 잡아 고산~성수산~장안산으로 향하면서 종국에는 지리산에 숨어들기 위한 행로를 보였다. 그러나 지리산 진입이 막히자 장안산 일대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흩어졌다.

회문산 지구 빨치산들도 8사단의 공격에 밀려 도망친 뒤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사령부의 정보계통은 이들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모여들고 있는 장소가 정보계통에 잡혔다. 덕유산 일대였다. 정보참모였던 유양수 대령은 작전계획을 변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양수 대령의 생각은 수도사단의 당초 공격로를 변경해 덕유산 일대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국진 대령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사단 규모의 작전을 함부로 변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유 대령은 “공 대령과 맞섰다. 결국 나는 참모장인 김점곤 대령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설득했으나 공 대령은 요지부동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결국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적의 집결은 우리가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시간상 여유가 없어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면서 작전계획 변경을 건의했다. 나는 이 문제를 곰곰이 따져 봤다. 유 대령의 건의와 공국진 대령의 입장에는 모두 일리가 있었다.

공 대령은 원칙론이었다. 모두 4개 사단이 움직이는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작전 차원에서 사단급의 큰 작전을 쉽게 변경한다는 것은 엄격한 군대의 영(令)을 세우고 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그러나 이번 작전은 게릴라를 상대로 펼치는 것이었다. 늘 움직이면서 변하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작전에서는 원칙론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저들이 변하는 만큼 이쪽에서도 원활하게 변해야 했다. 변칙에는 때로 변칙으로 대응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법이다. 고도의 융통성으로 작전을 끌고가야 적의 기민한 이동과 변술(變術)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했다.

아울러 수도사단이 맡았던 적은 수도사단이 끝까지 몰아가 소탕하는 게 바람직했다. 작전지역 변경이라는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수도사단이 처음에 몰기 시작했던 적을 끝까지 상대해야 적의 특성에 맞춘 작전을 적절하게 펼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고려사항의 하나였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유양수 대령의 작전계획 변경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공 대령을 불러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는 작전계획을 변경해 적을 몰아야겠다”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그는 그러나 내 명령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가 작전계획을 변경해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나는 ‘말’을 갈기로 했다. 유 대령의 건의를 받아들여 작전계획을 변경하는 것은 내가 고심 끝에 내린 명령이었다.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나선 마당에 결단은 신속해야 했다. 사령부를 이끌고 가는 중요한 참모진의 인사사항이자, 유능한 공 대령을 갈아야 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다.

공 대령을 해임하고 나는 박진석 중령을 후임 작전참모로 임명했다. 마침 참모장 김점곤 대령을 비롯한 참모진 대부분도 이 작전계획 변경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공 대령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작전을 구사하는 데에선 더 이상 문제로 작용하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가 내린 것이었다.

이 문제로 잠시 작전이 늦어졌다.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었던 까닭에 그를 중간에서 조정하느라 잠시 시간을 지체한 것이었다. 공 대령을 경질하는 것으로 그 문제의 단락을 지은 뒤 우리는 다시 작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적은 아직 숨어 있는 상태였다.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부대를 신속하게 움직여 포위망을 좁혀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쪽으로 향했던 수도사단의 주공(主攻)을 다시 북쪽인 덕유산으로 돌렸다. 일부 병력을 백운산과 천왕봉 일대에 잔류시켜 장안산에서 지리산으로 도주하려는 잔적(殘敵)을 차단하고, 주력은 덕유산과 삼도봉 일대를 포위해 들어갔다.

1951년 12월30일 작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수도사단 1연대는 경남 거창 방면에서 서쪽으로, 기갑연대는 전북 무주 방면에서 남쪽으로, 26연대는 전북 장수에서 동쪽으로 각각 덕유산을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항이 가장 거센 적을 몰아가는 작전이었다. 날씨는 더욱 추워지고 있었다.

적을 쫓는 우리도 고생이었지만, 병력과 보급이 부족한 적에게는 더 이상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치밀하게 적을 몰아가는 작업이 필요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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