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재기하려는데 또 10·26 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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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제가 정치를 이용한다고, 10.26을 이용한다고들 합니다. 그런 얘길 들으면 정말 써요. 이용할 생각했다면…, 후우…, 저는 그 사건으로 10년 동안 후퇴만 했습니다."

가수 심수봉(50)은 "활동다운 활동은 1979년 데뷔 이후 처음"이라고 말한다. 정규 앨범을 10장이나 냈으며, <그때 그 사람> 등 한국 가요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만들고 부르며 대가의 반열에 오른 아티스트가 이번 활동을 처음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심수봉이라는 세 글자는 가수의 이름을 넘어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79년 <그때 그 사람>으로 데뷔한 뒤 불과 4개월 만에, 대통령 시해현장에 있었다는 '역사적 이유'로 5년간 방송 출연 정지를 당했다.

80년에는 KBS 라디오 드라마 <여인극장> '순자의 가을'의 동명 주제가를 만들었지만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대통령 부인의 이름(이순자 씨)과 같다는 '정치적 이유'로 노래의 제목을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고쳐 방미에게 넘겼다.

작사.작곡자 이름에도 심수봉의 이름을 넣지 못했다. 이후 심수봉은 정신병원 치료과정에서 바륨에 중독되는 등 개인적 아픔을 겪었다.

"이번 10집 활동은 내 직업에 대해 스스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심수봉이라는 이름에 대한 시선,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받았던 불이익을 보상받는 건 아니지만, 음악활동에 대해 떳떳한 힘을 얻었어요."

지난해 2년간의 미국 뉴욕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새 마음으로 시작하는 심수봉의 '정치적 과거'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또다시 거론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 때문. 영화가 영문도 모른 채 당시 사건에 휘말리게 된 사람들의 사연에 초점을 맞췄다지만 심수봉 또한 영문도 모른 채 또다시 공포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

"가수 김윤아가 심수봉 역으로 출연한다고 들었을 때 우리끼리 농담으로 그랬어요. 그 자리가 안 좋은 자린데, 얼마나 끔찍한 자리인 줄 상상도 못할 거라고요. 영화는 안 볼 생각이고요, 작품성에 대해 논할 생각도 없어요. 다만, 현장을 가장 잘 아는 내게 왜 자문을 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아무튼 더 이상 그 일에 엮이기 싫어요."

심수봉은 당시 궁정동 현장에 함께 있었던 신 모 씨를 떠올리며 긴 한숨을 내쉰 뒤 "지난해 미국 LA에서 만났을 때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국악인 가족 출신인 심수봉은 미국 생활 중 뉴욕에서 처음으로 정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이번 음반에는 뉴욕서 얻은 여러 가지 음악적 성찰이 담겨 있다. 특히 <남자의 나라>라는 곡은 작사와 작곡뿐 아니라 재즈와 국악의 느낌을 혼합해 편곡까지 직접했다. 남성 중심의 가정 및 사회 문화를 비판하는 가사 또한 대단히 시적(詩的)이다.

'남자의 여자로 길들여진 척박한 이 땅/오늘밤도 마음 몇 번이나 이별의 잔을 든다/선녀 왜 떠났는지 나무꾼 아직도 모르나/하루가 천년같이….'

심수봉은 이번 활동을 공연 중심으로 활발히 할 생각이다. 지난해 콘서트에 정당 대표를 초청한 것도 과거를 딛고 일어서겠다는 용기에서 비롯됐다. "음악인이 공연하는데 대통령인들 초대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동안 세인의 시선을 피하던 내 생각이 틀렸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간스포츠 맹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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