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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신한금융의 뒷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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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반대가 닛산(日産)자동차다. 혼다차가 세계로 뻗어나가던 1980년대 닛산은 내부 투쟁으로 밤낮이 따로 없었다. 이시하라 다카시(石原俊) 사장이 해외 공장을 추진하자 가와마타 가쓰지(川又克二) 회장의 반대에 부딪혔다. 25년간 닛산을 지배했던 가와마타는 이시하라를 배신자로 간주했다. 노조도 회장 편에 섰다. 내분의 앙금은 닛산 기업사(史)에 이시하라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깊게 쌓였다. ‘기술의 닛산’은 더 이상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르노자동차에 넘어갔다.

재일동포가 세운 신한금융은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안다. 신한종합연구소만큼 일본 연구에 정통한 곳은 없다. 그런 회사에서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졌다. 넘버 1~3위의 권력투쟁이 한창이다. 물고 물리는 고소·고발 끝에 신한지주 신상훈 사장이 직무정지됐다. 그렇다고 라응찬 회장과 이백순 신한은행장의 판정승도 아니다. 검찰 조사와 금융감독원의 검사라는 2차전이 남아 있다. 신한금융의 운명은 검찰과 법원, 감독당국의 손에 달린 형국이다.

신한금융의 심상치 않은 기류는 지난해 가을부터 감지됐다. 그해 9월 중순 신한금융 3인방은 일본신한은행(SBJ) 개설에 성공한 뒤 청와대를 찾았다. 일본의 복잡한 금융 규제를 뚫는 데 청와대의 도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담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게 탈이 났다. 퇴진이 점쳐지던 라 회장의 4연임에 갑자기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거꾸로 역풍도 거세졌다. 라 회장의 금융실명제 위반 자료들이 여의도 정치권에 넘어가는 조짐이 나타났다. 올 봄 민주당은 “신한 사태의 배후는 영포라인”이라며 정치공세에 나섰다. 내부 갈등은 지역감정까지 얹혀져 외부로 번져 나갔다.

우리나라의 경영 승계작업은 자주 셰익스피어의 비극(悲劇)에 비유된다. 확실한 대주주가 없는 기업일수록 더욱 그렇다. 내부의 상처에 외부의 세균이 침입하면서 상처가 곪아터지기 일쑤였다. KB와 KT, 포스코는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전임 경영자들이 사법처리되거나 압수수색을 받곤 했다. 이런 줄초상을 겪고 난 뒤에야 인위적인 경영 승계가 이뤄졌다. 주식 분산이 잘 된 기업일수록 외풍(外風)에 약한 것이 한국적 역설이다. 외부 야심가에겐 구미가 당길지 몰라도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하버드대 조사에 따르면 외부 경영자가 영입될 경우 내부 승계보다 경영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20%가량 높은 것으로 나왔다.

이미 신한금융은 치명상을 입었다. 누구보다 안정된 지배구조를 자랑해온 만큼 심각한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이사회의 결정은 무책임하다. 이사회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양측이 고소·고발을 취하하도록 압박한 뒤 내부에서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게 올바른 수순으로 보인다.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경영권 승계마저 외부 결정에 맡기는 건 리딩뱅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퇴장의 전통을 가진 혼다차는 여전히 건강하다. 7대 사장으로 내려올 때까지 단 한 번도 잡음이 없었다. 끼리끼리 사장-회장-명예회장으로 돌아가며 안주(安住)하다 시들어가는 다른 일본 회사들과 다르다. 지금 신한금융에 절실한 것은 아름다운 뒷모습이 아닐까 싶다. 신한의 찬란한 신화(神話)의 완성도 퇴장의 미학에 달려 있다. 일본에 강한 신한금융. 검찰과 금감원에 신경을 쓰기보다 혼다의 기업사를 찬찬히 되새김질해 보았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