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행정 ‘역주행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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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여야가 지방행정체제 개편안 내용에서 구의회를 존치시키는 대신 풀뿌리 자치를 위한 ‘주민자치회’의 법인화 조항은 빼기로 했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13일 회담을 열어 4월 국회 지방행정체제개편 특위를 통과한 특별법안에서 이 같은 내용을 수정해 16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정치권이 ‘국가 100년 대계’라며 떠들썩하게 추진했던 지방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개혁의 핵심 내용은 모두 빠진 채 마무리된 것이다.

여야가 ‘4인 협상’(한나라당 허태열·권경석, 민주당 전병헌·조영택 의원)을 통해 최종 확정한 개편안은 특별·광역시의 구의회는 현행대로 유지한다는 게 골자다. 정치권은 6월 지방선거 직후 구의회 폐지조항을 없던 일로 하고 슬그머니 구의원을 되살렸었다. <본지 7월 1일자 3면>


여기에다 이번 추가 협상에서 읍·면·동의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주민자치회’에 법인 성격을 부여해 풀뿌리 자치를 구현하겠다는 조항도 삭제하기로 했다. 특위 관계자는 “민주당 등 야당에서 ‘우리나라가 생활자치를 구현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며 “읍·면·동을 행정기관으로서 존속시킨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또 전국 228개 시·군·구 통합의 기본계획을 마련하는 시기도 당초 ‘대통령직속 지방행정체제 개편위원회가 구성된 뒤 1년 이내’였던 것을 19대 총선거 이후인 ‘2012년 6월 말’로 연기했다. 지방행정체제 개혁을 차기 정권으로 넘기자는 야당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이처럼 지방행정체제 개혁안이 대폭 후퇴한 데 대해 허태열 의원은 “통합 창원시민 108만 명이 여당을 향해 ‘사기쳤다’고 반발하는 상황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야당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통합시 1호로 지난 7월 출범한 창원시가 행정체제개편 특별법 통과가 지연되면서 재정 혜택은 물론 부시장 2명 임명 등 아무런 인센티브(특례)를 못 받고 있는 게 양보의 이유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국회 안팎에서는 지방행정 개편안의 후퇴를 두고 “여야 지역구 의원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개혁을 후퇴시켰다”는 비판이 거셌다. 국회 관계자는 “6월 지방선거에서 여야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측근들을 특별·광역시 구의원(1010명)으로 앉힌 상황에서 이들의 이해부터 고려했다”고 지적했다. 주민의 풀뿌리 직접 자치를 위한 ‘주민자치회’의 법인화를 좌초시킨 것도 “지방행정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구·시의원, 그리고 구청 및 읍·면·동사무소 공무원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는 게 학계의 비판이다.

동국대 심익섭(행정학) 교수는 “정치권이 뉴욕·파리 등 세계 어느 대도시에도 없는 구의회는 그냥 두고 21세기 지방자치의 핵심인 주민자치는 토대부터 훼손했다”며 “국민들의 자치역량은 무시하고 정치권이 ‘그들만의 지방자치’를 하겠다는 거냐”고 반문했다.

정효식·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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