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39. 영화 배급업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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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84년 영화제작업을 시작했을 때 충무로에서는 나를 '깡통잡이' 출신이라고 불렀다. '깡통'은 영화 필름(프린트)을 담는 알루미늄 케이스를 말한다. 따라서 깡통잡이는 영화 배급업자를 일컫는 은어다. 배급은 제작사와 극장을 연결하는 일종의 유통업이다. 판권료를 주고 영화사로부터 작품을 산 다음 이를 다시 극장에 공급해 5대 5로 수익을 나누는 사업이다. 배급업자들은 서울, 부산, 경남북, 전남북, 충남북, 경기.강원 등 6개 권역으로 시장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74년부터 경기.강원(약칭 경강)에 배급했다.

▶ 1995년 4월 의정부 국도극장 개관식에서 축하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필자(오른쪽에서 셋째).

애초에는 배급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극장업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우연이었다. 의정부 중심가에 상가를 가진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부도 나게 생겼으니 날더러 상가를 인수해 달라고 했다. 건설 군납업을 10여년째 해오고 있던 나는 자금이 넉넉한 편이었다.

결국 은행 대출을 끼고 상가를 샀는데 그곳 2층에 중앙극장이 있었다. 의정부에는 중앙 외에도 평화.문화.시민회관 등 세 개의 극장이 있었다. 중앙은 위치도 좋고 시설도 괜찮은데 장사가 가장 안 됐다. 이유인즉 경강 권역 배급업자 세 명이 중앙을 제외한 세 개 극장에만 영화를 공급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미 걸었던 영화를 재상영하니 중앙은 이류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극장을 직접 운영하기로 하고 배급업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물건(영화)'을 좀 달라고 했다. 그러나 모두 고개를 저었다. 영화사들도 노크했다. 영화업이 허가제이던 때라 영화사가 20군데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도 "그동안 거래해 온 배급업자들과의 의리 때문에 안 되겠다"고 했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봉이 김선달' 전략을 쓰기로 했다. 1년분 영화를 몽땅 사 두기로 한 것이다. 영화사마다 찾아가 "올해 만드는 한국영화와 수입할 외국영화 리스트를 보자"고 했다. 연간 한국영화는 80편, 외화는 25편쯤 개봉될 때였다. 경강 권역 판권료는 한국영화가 편당 50만원, 외화는 500만원 선이었다. 현찰로 계약하자니까 그토록 '의리'를 따지던 이들이 금방 돌아섰다. 시세보다 20% 정도씩 값을 더 불렀다. 완성하지도 않을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거짓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입도선매를 했다. 물론 불안하긴 했다. 이들 중 몇이나 흥행에 성공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손해를 보더라도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끌려다닐 판이었으니까.

몇 달이 지나자 효과가 나타났다. 가는 곳마다 "경강 판권? 이태원이한테 팔았어" 라는 대답을 들은 배급업자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러면 어떡해? 혼자 다 사면 우린 어떡하라고? 이건 도리가 아니야."

"가세요, 저 혼자 다 합니다."

"너 망하려고 그래? 영화는 골라 사야지, 이러는 게 아냐."

"망해도 제가 망하니 걱정 마세요."

"야, 우리한테 물건 안 줄 거야?"

"안 줍니다. 제가 달랄 때는 왜 안 줬습니까?"

하도 단호하게 버티니까 어쩔 수 없었던지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앞으론 제 말 들으셔야 합니다." 결국 네 명이 함께 경강 권역을 반반씩 맡기로 합의하고 매점매석한 작품 절반을 처음 샀던 값으로 넘겨주었다. 노회한 배급업자들을 제압한 나는 배급업에 재미와 자신감을 붙여 건설업을 접고 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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