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과 태자당이 이끄는 외교부 외교아카데미 속히 도입해 개혁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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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외교부 특채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이 외교부의 고질적 병폐를 조목조목 짚었다. 그는 외교부 내부의 배타적 순혈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외교아카데미 설립을 제안했다. 중앙SUNDAY가 홍 의원을 만났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채(특혜 채용)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외무고시 2부시험(영어능통자 전형) 합격자의 41%가 외교부 고위직 자녀인 데다 이들 대부분 북미국·주미대사관 등 핵심 선호부서에 배치돼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 같은 의혹을 잇따라 제기하며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홍정욱(40·사진) 한나라당 의원을 9일 만났다.

외시든 특채든 순혈주의 강화
-특채 의혹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고 있다. 외교부, 대체 뭐가 문젠가.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900번 이상 침략당했고 지금도 무역의존도가 70%에 달하는 만큼 외교통상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폐쇄된 엘리트주의가 만연하면서 배타적 순혈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잡았다. 그 폐해는 제 식구 감싸기와 국민 여론에 대한 둔감함으로 나타났다. 외교부는 닫혀 있고 오만했다. 이번 특채 논란도 외교부를 갉아먹고 있는 왜곡된 부서문화에서 파생된 거다.”

-외교부 순혈주의를 타파하자며 도입한 게 특채 제도였다. 그런데 특채 역시 순혈주의를 강화했다는 얘긴가.
“다 엮여 있다. 순혈주의는 강력한 외무고시 기수문화로 대변된다. 상사와 부하 간에 수직적 명령체계가 엄존하다 보니 이번에도 장관에게 아무 말 못한 것 아니냐. 문제는 특채에서 터졌지만 이 같은 편법이 아무 제지 없이 이뤄진 바탕에는 배타적 순혈주의가 있다.”

-제도상의 허점은 없었나.
“많은 사람이 제도의 문제, 고시의 문제로 몰고가는데 그렇지 않다. 정책기조에 오류가 있었던 게 아니라 실행의 편법과 잘못이 문제였다.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였다는 거다. 무엇보다 정책을 실행하는 사람과 부서의 마인드를 세탁해야 한다. 이와 함께 그 사람들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어떤 견제 시스템이 가능한가.
“순혈주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외무고시를 통한 일률적인 선발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전문적인 인재를 채용하는 외교아카데미 시스템을 속히 도입해야 한다. 외시는 객관적이고 투명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언어와 전문지식이란 외교의 핵심 역량 측면에선 부족한 면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이제 국내에서 열심히 지식을 쌓은 사람과 해외경험을 쌓은 사람을 하나의 풀(pool)에 모은 뒤 1년여간 함께 교육시키면서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해야 한다. 이게 주류와 비주류를 없애는 길이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최고의 인재를 뽑아 양성해야 한다.”

과정이 투명해야 결과에 승복
홍 의원의 진단과 해법은 간명했다. 질문을 좀 더 구체화했다.
-시스템을 아무리 바꿔도 실행의 편법은 여전할 텐데.
“투명성과 공익성이 핵심이다. 선발 과정의 투명성은 이미 논의되고 있다. 외부인사들을 심사에 참여하게 하고 면접도 다단계로 하는 등 실질적 방안이 도입돼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투명성을 넘어 공익성이 추가돼야 한다. 특채를 뽑을 때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나 비정부기구(NGO) 등 공익단체에서 봉사한 경력을 중시해야 한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도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 만들어진 평화봉사단에서 활동한 게 외교관 경력의 밑바탕이 됐다.”

-외교부 개혁이 이번에도 유야무야되지 않을까.
“최전방에서 자료를 공개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과연 이 정도 충격으로 외교부의 고질적 병폐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단지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슬쩍 위기를 넘기고 또다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순혈주의로 복귀할 것인가. 지금의 특혜 의혹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공정한 사회는 대통령이 말한 대로 기회의 균등, 투명한 과정, 결과의 승복, 이 세 단계가 모두 뒷받침돼야 한다. 지금까지도 기회의 균등은 줬다. 모두 다 응모하게 했지만 불공정 경쟁 과정을 통해 특정인을 뽑으니 결과에도 승복할 수 없는 거다. 공정한 사회라는 칼을 빼들었을 땐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선의의 피해자 얘기도 나온다.
“외교부 개혁 논의가 자칫 한풀이나 마녀사냥으로 옮겨갈 우려가 있다. 공정한 사회라는 기준에서의 개혁이 포퓰리즘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 이미 외교관의 자녀라는 수식 하나만으로도 부정부패의 굴레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억대의 연봉을 마다하고 공직에 봉사하겠다며 고국에 돌아온 청년도 많고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외교관 자제도 적잖다. 이 친구들에 대한 주홍글씨는 어떻게 치유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외교부 내부에서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는데.
“외교부 내에 성골과 태자당이 존재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번에 외교부의 오래 묵은 고름이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이 계신 것 같다. 단순한 질시와 분노에 의한 제보가 아니라 이 기회에 외교부가 제대로 바뀌어야 한다는 진솔한 애정과 관심이 뜨겁다. 이번 사태는 편법을 쓴 사람, 반칙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결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외교부 특채 의혹을 제기한 뒤 우연히 댓글을 봤는데 ‘야, 홍정욱, 너도 영화배우 남궁원 아들이잖아’라고 쓰여 있더라. 솔직히 놀랐다. 아버지가 인기 배우셨지만 1년에 30편의 영화에 출연해야 생계가 가능했다. 밤무대를 뛰어야 돈을 버는데 자식들을 위해 그것도 안 하셨다. 나는 중3 때 유학 가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지금까지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친구들은 그만큼 빨리 죽을 거라고 하는데(웃음), 식사도 10분을 넘겨본 적이 없다. 나는 아버지와 아무 연관 없는 분야에서 열심히 뛰어왔다.”

‘톱다운 방식’ 한나라당 조직 문화

-최근 당내 초선 의원들이 모여 공정사회에 대해 토론을 했다던데.
“공정사회의 당위성엔 당연히 공감했다. 폭발성과 왜곡 가능성은 걱정스럽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걸 어떻게 승화시켜야 문화혁명 같은 사태를 막고 선진사회 진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고름은 터뜨려야 한다는 데는 컨센서스가 이뤄졌다.”

-초선 개혁모임도 흐지부지한 모습이다. 지난번 전당대회 때도 아쉬움이 많았고.
“한나라당의 조직문화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당은 전통적으로 모든 문제를 ‘톱다운 방식’으로 풀어가는 정당이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로부터 멀어지는 정당이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최근 당내에 2030본부를 만들었는데, 해법이 전국에 1만 대학생 조직을 만들자였다. 이건 젊은이들의 소통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발상이다. 이런 톱다운 방식에 익숙해진 문화에서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개혁 요구를 위협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초선 의원들이 모여 쇄신안을 내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총선까지 1년반 남았다. 많은 의원이 자신의 생존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까진 치고 빠지기식 쇄신을 했다면 이젠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나설 분이 많아질 거다.”

-소통이 늘 문제다.
“한나라당스러움의 요체가 소통의 부재라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 소통에 서투르고, 진정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은 소통을 홍보로 이해한다. 홍보는 일방적인 거다. 우리가 원하는 얘기를 수요자에게 전달할 뿐이다. 하지만 소통은 수요자가 원하는 걸 공급자가 들어주는 거다. 쌍방향에서 더 나아가 먼저 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홈페이지를 꾸미고 트위터를 개설하고 모바일을 공략한다며 물량공세를 펴도 국민이 모이질 않는 거다. 세종시·4대 강·집시법 등 온통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만 쏟아놓으니 거길 누가 들어오겠나. 기본적으로 소통에 대한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1만 전사를 조직하느니 차라리 20만 명의 대학생을 만나야 한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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