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 “다시 뛰게 해줘요” … 서재응 “말 대신 행동 보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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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14면

블랙볼(Blackball).
미국 스포츠계, 주로 메이저리그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야구공은 하얀 쇠가죽을 빨간색 실로 꿰매 만든다. 검을 수 없다. 그러면 블랙볼은 무엇을 가리키는 단어일까. 음주 파문이나 사생활 문제로 팀 내에서 말썽을 자주 부리는 선수들을 뜻한다.

운동장선 최고, 사회선 초보… 프로야구계의 악동들

한때는 메이저리그를 호령했으나 올 상반기 미국 독립리그를 거쳐 한국에서 소속 팀 없이 개인 훈련 중인 김병현(31)이 이른바 블랙볼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리스트가 A4용지에 인쇄된 문서처럼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만 각 구단이 선수의 성향과 사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김병현은 2004년 보스턴 소속으로 뛸 때 선수 소개 도중 홈팬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려 파문을 일으킨 뒤 결국 방출됐고, 이후 다른 팀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결국 메이저리그와 인연이 멀어졌다.

지난달 말 KIA 타이거즈의 투수 김진우(27)가 구단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단 초기였던 2003년 술자리 폭행 사건에 연루되면서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이후 2007년 2군 훈련 도중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팀을 떠났다. KIA는 그에게 여러 차례 기회를 줬지만 그때마다 결말은 좋지 못했다. “야구를 다시 하고 싶다. 정말 하고 싶다”고 선언한 뒤 다시 글러브를 내려놓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올 4월엔 일본 독립리그에 소속된 한국 팀 ‘코리아 해치’에서 잠깐 뛰다 다시 귀국했다. 김진우는 지금 KIA의 3군팀에서 재기를 위한 훈련을 하고 있다. 조범현(50) KIA 감독은 “일단 기회를 준다. 그리고 지켜보겠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소속팀 선임이자 투수 조장 격인 서재응(33)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면 우리 팀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우가 돌아올 즈음 LG에선 투수 이형종(21)이 팀에서 무단 이탈했다. 2006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눈물의 역투로 화제를 모았던 그는 계약금 4억7000만원을 받고 들어온 기대주였다. 팔꿈치 인대접합수술로 기나긴 재활의 시간을 보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감독과 구단에 항의성 글을 올려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더 못 견디고 결국 임의탈퇴됐다. 과거로 돌아가 보면 이런 사례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구단과 야구계에서 쉬쉬해서 그렇지 예전보다 지금이 더하다고 볼 순 없다. 최악의 사례를 만들어낸 이는 아마도 정수근(33)일 것이다. 1995년 OB에 입단한 그는 화려한 주루 플레이와 미디어 친화적인 입담으로 꽤 인기를 누린 전국구 스타였다. 정수근은 2003년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술자리 싸움에 연루되어 미국 법정에 섰다. 2004년엔 부산 해운대에서 술을 마시다 시민과 시비가 붙었다. 이후 무기한 실격 징계라는 무거운 조치가 한국야구위원회 차원에서 내려졌지만 1년도 안 돼 구제받았고, 다시 음주 사건에 얽혀 결국 은퇴했다.

노장진(36)이라는 투수가 있었다. 젊은 팬들에겐 기억이 이제 가물가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공주고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초고교급 스타로 일찌감치 이름을 떨쳤고 1993년 빙그레에 입단해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무단이탈과 잦은 음주 등으로 삼성·롯데 등을 전전했다. 방황은 계속됐다. 노장진과 한 팀에 속한 동료 선수들은 예상대로 무척 힘들어했다. 롯데를 마지막으로 그는 유니폼을 벗었다.

모든 조직과 집단에선 문제되는 인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른바 탕아, 기피인물이다. 선수들의 이탈과 방황은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궁금한 것은 다음 질문이다. 왜 이들은 돌아오기 어려울까. 왜 돌아와도 예상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짐을 싸서 사라지게 될까. 가정 문제 또는 성장환경 때문일까. 그들을 보듬고 있는 집단에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노장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강병철(64)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명쾌하게 이런 진단을 내린 적이 있다. “이런 선수들은 야구를 너무 잘해서 그렇다.” 무슨 말일까. 이들은 어려서부터 ‘야구를 너무 잘하던’ 선수들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른들이 다 해결해준다. 사고를 쳐도 우리 팀 에이스니까. 이 선수가 빠지면 동기들의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워지니까. 이해심 많은 어른들이 뒤처리를 다 해줬다. 잘못을 저질렀어도 다시 돌아와 고개 한 번 푹 숙이면 된다. 그 죄송함을 다시 마운드에서 실력으로, 타석에서 솜씨로 보여주면 됐다. 한번 일으킨 잘못이 일정한 처벌의 체계 속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찌꺼기가 그대로 누적된다. 이렇게 되니 앞의 작은 잘못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무감각해진다. 해당 선수를 데리고 있는 팀이나 해당 선수나 마찬가지의 과정 속에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강 감독은 “자신의 문제가 터졌을 때 답을 구하지 못한다. 항상 남들이 도와줬다. 어느 날 관심과 기대가 아예 멀어지면 묘하게 사고를 치고, 다시 와서 도와 달라고 신호를 보낸다”며 해당 선수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즉, 개인의 문제도 있지만 구단이 선수를 ‘상품’으로만 여긴다는 점도 심각하게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계약금 7억원짜리 선수라면 구단에선 응당 7억짜리 상품 값을 할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가 고교를 갓 졸업한 어린 선수에 불과하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KIA가 김진우의 첫 일탈에 대해 진정 슬기롭게 대처했는지, 아직 정확한 평가는 없다.

한국에서 언제부터 프로스포츠가 자리를 잡았는지도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다. 직업으로서의 야구선수가 제대로 자리 잡을 즈음 오히려 이러한 일탈 선수들이 증가하고 있다. 강병철, 김응용(69), 김인식(63) 등 프로야구 1세대 감독들은 고교를 졸업한 뒤 주로 은행 계열의 실업야구에서 뛰었다. 세미프로에 가까웠던 이들은 일반 직장인들보단 그 강도가 덜했지만 똑같이 대리 승진시험도 치르고 은행업무도 맡아야 했다. 야구인이자 사회인으로서의 적응과정을 넘어선 이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선수들은 고교를 갓 졸업하고, 오로지 실력과 재주로만 평가되는 험난한 승부의 세계에 전면 배치된다. 숫자와 성적으로만 평가되는 야구에서 막상 문제가 생겼을 때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핵가족 사회는 이미 진행된 지 수십 년. 따라서 선수들의 정신력이 예전보다 많이 약해졌다며 개별 선수들의 인성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얘기다.

글로벌 기업들은 임직원이 다른 나라로 업무 배치되면 재배치 컨설턴트를 고용하기도 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걸 돕는 이들이다. 반면 ‘남성다움’이 강조되는 스포츠에서 이런 배려는 종종 무시된다.

유럽 프로축구에서 이런 사례가 있다. 비싼 몸값을 주고 데려온 젊은 아프리카 출신 선수 두 명이 팀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들은 아파트에서 음악을 듣기를 즐겼다. 그러나 아래층의 항의로 더 이상 음악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스피커는 마룻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천장이 울리니 아래층에서 항의한 것이다. 구단 직원은 스피커를 가구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문제를 바로잡았다. 더 이상 항의도 없었고, 두 선수는 경기장에서 펄펄 날아다녔다.

넥센 투수 CJ 니코스키는 “한국은 심리 치료에 소홀한 것 아닌가”라는 말을 했다. 지난달 말 KIA 윤석민과 롯데 조성환의 몸에 맞는 공 소동이 벌어진 뒤 윤석민이 병원 신세를 진 것을 두고 이런 지적을 했다. 맥락은 다르지만 팀 내 부적응 자에 대한 스포츠심리 컨설팅이 한국 프로스포츠에선 사실상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다. 윤석민은 상대 선수 머리에 공을 맞히고, 스스로 충격을 받아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으로 심리치료를 받았다.

니코스키는 “상당수 미국 프로팀은 스포츠 심리학자를 구단에 상주시킨다. 메이저리그가 선수들의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덜어주기 위해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설명했다. 보스턴은 스포츠 심리학자도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더그아웃에서 함께 경기를 지켜본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는 동시에 선수들과 호흡하며 심리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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