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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전 일본 통해 배운 한국, 일본 무대 127번 제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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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14면

10일 제주 해비치컨트리클럽에서 열린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한일프로골프대항전 1라운드에서 이시카와 료 선수의 티샷을 갤러리들이 지켜보고 있다. [제주=뉴시스]

한국과 일본 골프가 제주에서 ‘창과 방패’로 충돌하고 있다. 10일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제주 해비치 골프장에서 6년 만에 부활한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한·일 프로골프 국가대항전에서다. 사흘 동안 겨루는 이 대회는 12일 최종 승부가 갈린다. 역대 전적에서는 한국이 2004년 첫 대회에서 우승, 1승무패로 앞서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 골프가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다. 현재 세계무대에서는 한국 남녀 선수들이 골프 선진국 일본보다 더 나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 일본 골프를 뛰어넘은 것일까. 일본 골프를 통해 한국 골프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10~12일 국가대항전 한국 골프 vs 일본 골프

한국 골프는 일본을 보고 배웠다. 한국에 골프가 들어온 것은 일본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1921년 경성 철도국이 효창원 코스(9홀·경성GC)를 만들면서다. 사적 고증으로 인정할 만한 한반도 최초의 클럽인 것이다. 일본도 최초의 골프코스(고베GC 4홀)의 준공 시점인 1901년을 일본 골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할 때 한국은 89년, 일본은 109년의 골프 역사를 갖고 있다. 20년의 차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 골프는 첫 프로골퍼인 연덕춘이 1941년 최고 권위의 일본 오픈을 제패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20년의 간격은 연덕춘이 적지에서 첫발을 내디디면서 추격의 물꼬를 텄다.

물꼬는 텄지만 그 물을 가둘 전답(선수)이 없었다. 한·일 프로골프 국가대항전의 단장을 맡고 있는 한장상이 등장할 때까지 공백기가 이어졌다. 31년 만인 72년 한장상이 연덕춘에 이어 일본 오픈을 제패한 것은 이변이었다. 당시 한장상은 일본 골프계의 영웅 점보 오자키를 1타 차로 꺾어버렸다. 말 그대로 쾌거였다. 이후 한국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종덕과 임진한·최경주·허석호·양용은 등이 출현하면서 일본 등 해외 골프무대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2010년 8월 현재까지 한국 남자 골프가 일본 무대에서 일궈낸 승수는 총 27승이다. 여기에 한국 여자 프로골퍼들이 지난달까지 합작한 100승을 포함하면 한국 남녀 프로골퍼가 일본에 거둔 승수는 무려 127승이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최근 20년간 한국 골프는 양적·질적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한국 골프가 이 같은 승수만큼 발전한 것은 아니다. 선수 개인은 명예와 부를 쌓았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을 실천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일부 단체는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매년 대회 개최에 애를 먹고 있다. 개인의 성과물은 있지만 한국 골프를 관통하는 문화나 정신은 없다는 얘기다. 협회의 부실한 행정력도 문제다. 한국 골프 역사의 권위자로 중앙 일간지에서 골프 담당 기자를 지냈던 최영정(79)씨는 “이번 한·일 프로골프 국가대항전은 한국 출전 선수를 놓고 본다면 반쪽짜리 또는 B급 대회”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일류급 선수들은 모두 빠졌다는 지적이다. “선수로서 국가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은 불명예스러운 처신”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걸 그냥 바라보고 있는 경기단체도 문제라는 얘기다.

반대로 일본은 일본 골프의 ‘뉴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시카와 료를 비롯해 일본프로골프(JGTO) 투어의 랭킹 포인트에 따라 출전 자격이 부여된 모든 선수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출전하면서 한국과는 큰 대조를 이뤘다. 최영정씨는 “우리 선수들은 해외로 진출하면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면 “일본은 국가적인 대사에는 똘똘 뭉치는 순혈주의적 성향이 높다”고 했다. 일본 골프의 ‘숨겨진 2인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의미다.

6년 만에 한·일 프로골프 국가대항전이 열리는 만큼 대회 장소로는 국민적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서울 근교의 남양주 해비치 골프장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갑자기 제주 해비치 골프장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골프연습장(드라이빙 레인지)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JGTO는 “경기에 앞서 선수들이 몸을 풀 수 있는 드라이빙 레인지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코스 변경을 요구했다. 언뜻 보기에는 하찮은 문제다. 지금까지 드라이빙 레인지가 있든 없든 간에 대회를 치러왔던 한국프로골프투어(KGT)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JGTO는 양보하지 않았다. 일본 측은 “선수가 우선이다”고 입을 닫았다. 바로 여기에 일본과 한국의 근본적인 ‘골프 문화’ 차이가 있다. 일본은 골프대회를 개최하는 데 지켜져야 할 원칙은 끝까지 고수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PGA나 LPGA투어도 이 같은 원칙을 고수하기는 마찬가지다. 스폰서의 입맛대로 대회가 열렸다가 없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이처럼 JGTO의 원칙 고수는 곧바로 협회의 강력한 위상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선수들도 그런 협회의 카리스마에 고개를 숙인다. 스폰서가 아닌 선수 편에 서서 대회를 만들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JGTO의 유스케 오니시 홍보팀장은 “스폰서에 대한 협회의 주도적인 역할(40%)과 일본의 경제 발전(30%), 점보 오자키 등의 계보를 잇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의 탄생이 일본 투어의 활성화를 꾀했다”고 말했다.

일본은 세계 각국의 골퍼들이 국가의 명예를 걸고 다투는 골프월드컵을 세 차례나 개최했고 우승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유치를 못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이미 30년 전에 남녀 프로골프 투어를 각각 연간 30개 가까이 치르면서 ‘투어 프로골퍼 시대의 개념’을 정립했지만 한국은 3~4년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은 이 같은 튼튼한 내수시장 때문에 자국의 투어 수준을 미국 무대와 대등한 관계로 보고 있다. 미국 시장과 견줄 수 있는 세계 양대 투어란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일본 선수들 또한 “왜? 미국 투어로 가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JGTO에서 뛰고 있는 김경태는 “일본 선수들은 자국 투어에 대한 자긍심이 무척 강하다. 그만큼 프로선수들에 대한 예우를 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스케 홍보팀장은 “골프 관련 산업에서 선수에 대한 지원이 한국보다는 더 적극적이다. 지원 규모도 한국보다 커 선수들이 더욱 골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골프의 또 다른 강점으로 대학 골프의 활성화를 꼽았다. “일본대를 비롯해 골프부를 이끌고 있는 각 대학이 전년도 성적에 따라 A, B, C그룹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경쟁한다”고 소개했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골프를 병행하는 선수를 더 높게 평가한다”고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일본 JGTO의 학사프로 비율은 60%가 넘는다. 한국은 30% 정도다. 한국은 ‘고등학교 졸업=프로데뷔’란 등식이 공식화된 지 오래다.

국내 투어 시장이 열악해 해외 투어로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을 돌려세울 수 있는 골프투어의 장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세계무대에서 한국 골프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 또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영정씨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더라도 자신이 뛰었던 고국 투어의 활성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소한 자국의 내셔널타이틀 대회에는 만사 제쳐 놓고 출전하는 게 옳다는 얘기다. 87년 LPGA투어에서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차지했던 오카모토 아야코와 PGA투어에서 뛰었던 마루야마 시게키 등이 해외무대에서 활약하면서도 일본여자오픈과 일본 오픈에 꾸준히 출전했던 것이 좋은 본보기다. 이 또한 한국과 일본 골프의 극명한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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