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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낯선 일본인 목숨 구한 재일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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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 노인을 구한 양현옥씨와 당시 사건을 보도한 지난달 21일자 일본 마이니치 신문.

지난달 19일 오후 8시20분, 일본 오사카(大阪) 지하철 센니치마에(千日前)선의 니혼바시(日本橋)역 플랫폼.

매주 화요일 오사카경제대학으로 출강하는 양현옥(42)씨는 여느 때처럼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걸 타야 때맞춰 나고야(名古屋) 인근 오카자키의 집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탈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선로 위에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열차가 역 구내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양씨는 "비상벨을 눌러라"고 외친 뒤 곧 1.3m 아래 선로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한 젊은이가 뒤따랐다. 둘은 힘을 합쳐 노인을 구해냈다. 열차는 몇십m 후방에서 급정거했다. 양씨가 플랫폼으로 올라서자 역무원은 "1초만 늦었어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역무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서둘러 귀가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3주 후인 10일 오후, 양씨는 오사카 미나미(南)경찰서로부터 감사장을 받는다. 74세 노인을 구한 공로다. 노인은 당시 역 구내에서 37세 회사원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떼밀려 선로로 떨어졌다. 당시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어 입원 치료를 받다 9일 퇴원했다.

그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진 건 실로 우연이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누군지 몰랐다. 오사카 지역 언론들이 "선행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보도를 며칠간 내보냈지만 그는 이런 사실 자체를 몰랐다.

양씨는 그 다음주 화요일 다시 오사카경제대학에 강의를 나가 한 동료와 대화하다 그 때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동료가 화들짝 놀라며 "그동안 신문.방송에서 그렇게 보도했는데도 몰랐느냐"고 했다. 또 다른 동료는 손수 니혼바시역으로 연락을 해줬다.

양씨와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자칫하면 이수현씨(몇 년 전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한국의 대학생)처럼 될 수도 있었다" 고 하자 그는 "(죽을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묘하게도 사고 현장과는 인연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 저수지에 빠진 친구를, 중학생 때 전복된 트럭 안에 갇힌 운전사를 구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인 1980년 광주에서 시위대에 쫓기던 한 여성을 자전거에 태워 안전한 곳까지 도피시켜 준 적도 있었다고 했다.

전남 곡성 출신인 그는 88년 부산외국어대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5년 정도 무역업을 하며 학자금을 마련한 뒤 과 동기인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오사카경제대학에서 석.박사 학위(경제학)를 받았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부인은 오카자키여자단기대학의 부교수로 있다. 양씨는 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오사카경제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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