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부터 한·미 FTA 실무협의] 스크린쿼터 해결돼야 협상 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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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146일 한국 영화를 상영하라는 스크린쿼터제는 오히려 한국 영화산업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1998년 7월 21일 당시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은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을 방문해 스크린쿼터를 푸는 것이 합당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영화계가 들끓기 시작했다. 노령의 임권택 감독이 삭발을 하고 한석규.심은하 같은 톱스타들이 종로 바닥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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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투자협정(BIT) 협상은 스크린쿼터에 발목이 잡혀 멈췄다. 영화계 안에서도 극장업계 등은 찬성하고 제작자와 배우협회는 반대해 의견이 엇갈렸지만 협상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7년여가 지난 지금 스크린쿼터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통상 BIT를 포괄하는 자유무역협정(FTA) 협의가 한.미 간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는 한국과 미국 정부 간 FTA 사전 실무 점검협의 제1차 회의가 3~4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1일 밝혔다.

양국 정부는 이번에 양국의 FTA 추진 절차 및 현황, 이미 체결한 FTA 협정문의 주요 내용에 대해 논의하고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전문가의 연구 결과를 청취할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FTA 본 협상을 시작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며 이번 협의는 어디까지나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소개팅'에 가깝다"고 말했다. 정부는 한.미 FTA 논의가 FTA 본 협상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장기간 표류 중인 한.미투자협정 꼴이 날까 우려해서다.

◆ BIT 안되면 FTA도 어려워="올해 한국이 APEC 의장국직을 수행하면서 한.미 양국 통상 현안에도 실질적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크린쿼터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달 28일 한국능률협회 주최로 열린 최고경영자 조찬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스크린쿼터 문제 해결이 BIT가 진전되는 계기가 되고 이후 FTA도 진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크린쿼터 문제 해결로 물꼬를 트지 않으면 BIT와 FTA 체결이 모두 어렵다는 미국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FTA는 최근 들어 관세 철폐 등 무역분야뿐 아니라 기술장벽.경쟁정책.정부조달.투자.지적재산권.전자상거래 등을 포함한 포괄적 협정으로 발전하고 있다. 투자분야의 BIT를 타결짓지 못하고 FTA를 매듭짓기 어려운 이유다.

사실 BIT는 한국이 먼저 원했다. 외환위기 이후 미국 투자를 유치하고 대외신인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차례의 협상 끝에 윤곽이 잡혔으나 스크린쿼터, 저작권 소급 보호, 기간통신사업 추가 개방 등 쟁점에서 막히기 시작했다. 특히 스크린쿼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쪽 입장이어서 협상은 2000년 5월 이후 전면 중단됐다.

세계은행 보고서(2003년)는 "투자 환경이 좋은 국가에서는 BIT 체결이 외국인 직접투자 규모와 상대적인 비율의 증대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한.미 간에 BIT가 체결되면 매년 27억 ~50억달러의 투자를 더 유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국가의 품격 높일 기회=한.미 FTA가 산업에 미칠 파장을 저울질해 왔던 한국은 지난해부터 FTA를 잃을 것보다 얻을 게 많은 협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세.비관세 장벽이 제거되면 대미 수출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도 미국 시장에 겪는 반덤핑 등 수입제한조치들을 협상 과정에서 적극 거론해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물론 농산물과 서비스 시장 개방은 넘어야 할 '민감 품목'이다. 그러나 KIEP는 최근 보고서에서 사과.배.수박 등 과실류의 경우 장시간 운송이 필요하고 미국 품종의 경쟁력이 떨어져 문을 열더라도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쌀 시장 개방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무역기구(WTO) 협상이 예정대로 마무리되면 FTA 협상에서 이를 준용해 협정에 포함하면 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육류에 대해서는 개방압력이 커질 전망이다. 또 미국은 교육.의료.법률 시장을 FTA 협상 과정에서 추가로 개방하라고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교역에서 얻는 이익뿐 아니라 산업구조의 선진화, 정치.안보적 동맹 보완 등을 통해 얻는 이익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김도훈 산업연구원 국제산업협력실장은 "한.미 FTA는 유럽연합(EU).일본보다 교역 증대 효과가 크고 경제구조를 선진화해 나라의 품격을 높이는 효과까지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귀식.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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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둘 이상의 국가가 무역장벽을 허물어 자유롭게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고 서로의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협정이다. 협정을 맺은 나라끼리는 대부분의 품목을 관세 없이 수출하고 수입하는 등 시장이 통합되는 효과가 있다.

◆ 투자협정(BIT, Bilateral Investment Treaty)=나라끼리 투자자 보호와 투자 증진을 위해 체결하는 협정으로 투자와 관련된 사항에서는 외국인에게 내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핵심 내용. 외국인 투자자의 재산 보호만을 약속하는 투자보장협정과는 달리 전면적인 투자 자유화가 이뤄진다.

◆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연간 일정한 일수 이상은 반드시 국산영화를 상영하도록 하는 것. 현행 영화진흥법 시행령에 따르면 연간 상영일수의 40%인 146일은 의무적으로 국산영화를 상영해야 하며 영화 수급 사정 등에 따라 40일을 줄일 수 있도록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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